권재일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장
권재일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장(69)은 2008년부터 남북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장, 국립국어원장, 한글학회 회장과 재단이사장을 연이어 맡았다. 우리 언어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국어학 분야와 한글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올해 한글날을 맞아 ‘세종문화상’ 학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산시가 추진하는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큰 우려를 표명했다.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정책이며, 결국 우리말의 전통과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 정책에 투입될 예산은 막대하다. 지난 8월 1일 부산시가 내놓은 공약추진기획단 백서에 의하면 2026년까지 인프라 구축에만 292억원이 투입될 전망이다.
재원 마련과 구체적인 투입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돼 공개된 것이 없다. 지난 8월 9일 부산시 교육청과의 협약서에는 권역별 영어교육센터와 거점학습 공간, 부산형 영어교육프로그램 개발, 영어방송 전문화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제시됐다. 권 이사장은 이 정도 방안으로 영어상용도시가 구축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간 실패했던 여러 지자체의 ‘영어마을’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구상과 다름없다고 했다.
“‘상용’이라는 말은 공용어로 쓰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일상과 공공언어로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사용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홍콩은 영어와 중국어를, 싱가포르는 영어와 중국어를 포함한 4개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정도가 되려면 지금까지의 영어 교육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우선 ‘상용화’라는 용어는 부산시가 하려는 일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예산, 인력과 시간을 투입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제 말기에는 일어를 상용했는데, 관공서는 물론이고 학교와 거리, 심지어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쓰도록 했죠. 그것은 굉장한 억압과 강제조치를 동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엑스포를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그러면 영어전문가를 키워야지 왜 일반 시민에게 영어를 가르칩니까? 단순히 예산만 낭비하는 게 아니라 국어에 대한 무시와 홀대가 동반된다는 점도 우려스럽습니다.”
요컨대 불가능한 정책이라면 시도할 필요가 없고, 엑스포를 위한 대책이라면 영어전문가를 키우는 데 집중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영어에 익숙한 자원봉사자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대안일지도 모른다.
일제 때부터 우리말 애착 강했던 부산
부산 영어상용도시 정책과 관련해서는 한글학회 부산지회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화단체와 시민을 대상으로, ‘글로벌 허브 도시’가 영어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설득 중이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발상도 황당하고, 일반 시민의 영어구사력을 잣대로 도시 수준을 평가하려는 발상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1942년 10월 1일은 꼭 기억해야 할 날입니다.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관련자 33인이 일제에 의해 체포·구금된 날입니다. 올해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최현배·안호상·이우식·이극로 선생 등 서른세분 중의 상당수가 부산과 경남 출신이었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긍지가 강했던 지역에서, 지금 영어상용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유감스럽습니다.”
한글학회는 1991년부터 위상과 역할이 달라졌다. 그 이전에는 표준어와 맞춤법의 규범을 관리하는 일, 국어 순화에 관한 일, 사전 편찬을 포함한 어문 정책 전반을 다루는 역할을 맡았다. 지금은 국가기관인 국립국어원이 그 일을 맡고 있다.
“외래어와 어려운 한자어를 쉽고 정확한 우리말로 다듬는 국어 순화에 관계되는 일에 집중합니다. 국민을 계몽하는 일은 아무래도 민간단체에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국어와 한글 관련한 학술활동도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죠. 정기간행물 ‘한글’을 1년에 4차례 내고 있는데, 1932년에 창간됐으니까 우리나라 학술지로서는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글 새소식’이라는 계몽적 성격의 잡지를 매달 발간하고 있고요. 매년 2차례 규모가 큰 학술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한글학회는 주요한 업무가 정부로 이관된 1991년 이후에는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다. 한글학회 회장이 연구와 계몽활동을 책임지고 있다면, 재단 이사장은 그런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와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건물의 임대료 수입이 주요 재원이다. 이인 초대 법무부 장관이 자신의 효자동 집을 팔아 희사한 재원이 한글학회 독립적 운영의 토대가 됐다.
“1975년 이인 선생이 당신의 효자동 집을 팔아 그 절반을 한글학회에 내놓았습니다. 당시 서울 중심 효자동의 집값은 굉장히 비쌌습니다. 신축 건물 공사비의 절반 정도가 그 돈으로 충당됐으니 거액을 희사했던 겁니다. 부족한 절반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정부 예산을 투입했습니다. 이인 선생은 효자동 집을 판 돈의 절반을 가지고 당시에는 논밭이나 다름없던 논현동에 집을 지었습니다. 돌아가실 때 그 집마저 한글학회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 논현동 한글학회 소유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 수익이 재정적으로 큰 버팀목이 됩니다.”
‘한글 세계화’ 아니라 ‘한글 나눔’
그간 권 이사장은 한국어와 한글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한국어의 세계화와 한글의 세계화에 대해서는 적절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글에 관해서는 세계화라는 관점보다 ‘나눔’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이 우리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핵심은 경제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경제적인 기회를 포착하고 삶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려 합니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은 전 세계에서 같은 날 동시에 실시하는데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같은 곳에서는 수험생이 장사진을 이뤄 교통이 마비될 정도입니다. 문화 역량이 그다음입니다. 음악, 영화, 음식 등에서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세종학당에는 한국어 강의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갈망이 커졌기 때문이죠. 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은 현재 84개국에 224곳이 설치돼 있습니다. 북미와 중남미,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가리지 않습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한국어 교육기관이 그토록 광범위하게 운영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죠. 1997년 한국어능력시험이 처음 생겼는데, 첫해 3000명이 응시해 당시 관계자들이 굉장히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30만명이 응시해 25년 만에 무려 100배가 늘었습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예산의 책정과 지원이 일원화돼 있지 않다는 점을 그는 우려한다.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외교부, 여성가족부 등에 산재해 있는 현재의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산을 집중하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데, 부처별로 예산 확보를 두고 경쟁을 하니까 교통정리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느슨하게라도 협의체를 만들어 정책을 집중하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지금까지 한국어 교육이 양적으로 팽창했다면 이제 교육의 질이 더 높아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중학생이 영어를 배우는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고등학생 정도가 구사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을 현지에서 실시해야 합니다. 교사들도 이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84개 국가의 사정에 맞는 교재 개발도 보통 일은 아닙니다. 상당한 예산과 함께 고급 인력이 필요합니다. 현지의 교사를 채용할 필요도 있는데,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사·교재·교육 과정을 잘 정비해야 하는데, 결국은 그게 재정적인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런 예산은 사실 우리가 영어를 교육하는 데 투입하는 비용에 비하면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 부산시가 영어를 상용화한다면서 책정한 예산 정도면 그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보기에 한글 세계화라는 말은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이제는 글자를 갖지 못한 소수민족을 돕기 위해 한글 보급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한글 나눔’이다. 문자 생활의 평등이라는 관점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중요한 대의 중의 하나였으니, 그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다.
“문자로서의 한글은 그 우수성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입증됐습니다. 휴대전화의 자판 활용에 있어서 한글 자판은 대단히 효율적인 체계입니다. 세종대왕께서 미래의 휴대전화를 염두에 두고 한글을 만든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입니다. 전 세계에는 말은 있지만 문자를 가지지 못한 소수민족이 많습니다. 그 민족에게 우리 한글을 그들의 표기법으로 쓰게 하자는 취지가 바로 ‘한글 나눔’ 정신입니다. 그러려면 두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 언어의 자음과 모음을 분석했을 때, 우리 한글 자모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그런 소수민족이 속한 국가의 언어정책입니다. 중앙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문제이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볼리비아 소수민족 아이마라족에 대한 ‘한글 나눔’은 권 이사장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지금은 일단 보류된 상태다. 그는 2012년부터 3년간 겨울방학 때마다 볼리비아를 방문해 현지 조사와 연구를 추진했다. 휴대전화에 자판을 넣는 것까지 협의가 됐는데, 막판에 볼리비아 현지의 반론이 제기됐다.
“전자제품을 만드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진출이 굉장히 활발한 곳이 볼리비아입니다. 한국산 제품이 휩쓸고 있는데, 문자마저 한글을 쓰게 되면 문화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는 목소리가 표출됐죠. 아프리카 피그미족은 어느 정도 성사 단계에 와 있습니다. 솔로몬제도의 소수민족은 연구를 완료해 교과서까지 만들기는 했는데, 아직 보급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지어달라는 요구에 대해 재정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 대한 한글 나눔이 가장 모범적입니다. 얼마 전 한글학교 준공식을 가졌을 정도로 나눔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편찬 80% 진척
권 이사장은 2008년 2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제2기 남측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임기는 3년이었지만 2009년 국립국어원장을 맡게 되면서 위원장직을 그만두고 지금은 편찬위원회의 이사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은 1989년 문익환 목사의 평양 방문이 계기가 됐다. 김일성 주석과 <통일국어사전> 편찬에 합의한 것을 발판으로 2004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천안함 사건 등 남북관계 경색으로 난항을 겪었지만, 현재까지 4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80% 정도의 진척을 보이고 있다. 권 이사장은 2005년부터 편찬위원회 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저는 표기법을 통합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띄어쓰기, 두음법칙, 사이시옷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죠. 25만 단어에 이르는 수록 표제어는 완전히 합의를 봤고, 나머지 뜻풀이 작업도 50%는 합의가 완료됐습니다. 나머지 50%의 뜻풀이도 우리 측 안은 작업을 마쳤습니다. 2005년 개성시 봉동관 식당에서 북측 대표와 제가 만나 자모의 순서를 정하는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자음의 순서를 정할 때 저는 한가지만 양보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옷(ㅅ) 다음에 이응(ㅇ)이 나오지만, 북한은 자음 히읗(ㅎ)까지 다 끝난 다음에 이응(ㅇ)이 나옵니다. 언어학적 논리로 보면 북측이 맞습니다. 왜냐면 이응(ㅇ)은 자음이 아니라 모음이니까요. 옥신각신하다 결국 북측이 저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다음 날 모음 순서에서는 우리가 대폭 양보했습니다. 모음 순서는 우리가 양보해도 크게 밑질 것이 없다고 보았거든요. 왜냐하면 우리 국민 대부분은 북측의 모음 순서 ‘아야어여오요우이’를 우리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모 순서를 정했던 그 협상 과정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민감한 어휘 ‘간첩’의 뜻풀이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합의에 이르렀을까? 권 이사장의 파일에는 그 과정이 이렇게 정리돼 있다. ‘간첩’이라는 어휘에 대해 남측은 중립적인 표현, 북측은 부정적인 표현을 주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1단계 남한의 시범 뜻풀이-어떤 나라나 단체의 비밀이나 형편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나라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
제2단계 북한의 검토 뜻풀이-어떤 나라나 군대 또는 일정한 단체의 비밀을 몰래 알아내어 적대 또는 경쟁 관계에 있는 편에 제공하는 자. *북측 의견: 간첩이라고 하면 말하는 사람의 ‘립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나쁜 사람이다. 때문에 사람이라고 하기보다 ‘자’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3단계 남한의 재검토 뜻풀이-어떤 나라나 군대 또는 일정한 단체의 비밀을 몰래 알아내어 적대 또는 경쟁 관계에 있는 편에 제공하는 사람. *남측 의견: 간첩은 그 일을 시키는 측과 당하는 측이 서로 다른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 경우이므로 중립적인 표현으로 풀이하는 것이 좋겠다.
제4단계 집필회의 후 최종 완성 원고-어떤 나라나 군대 또는 일정한 단체의 비밀을 몰래 알아내어 적대 또는 경쟁 관계에 있는 편에 제공하는 자. *합의: 북한 측에서는 간첩을 ‘~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결국 ‘~하는 자’로 표현하기로 합의했다.
<한기홍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