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잇소리(Exist Within)
제작연도 2022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06분
장르 스릴러
감독 김정욱
출연 류화영, 박진우, 정동훈
개봉 2022년 1월 13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제작 ㈜트루라이즈픽쳐스 ㈜유비네트워크
배급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공동배급 ㈜아크메
왜 층간소음이 아니라 사잇소리일까. 영화감독이 한글순화운동,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일까. 아마도 층간소음과 관련한 상투적인 ‘괴담’을 다루는 영화로 인식되는 것이 싫어서쯤이 아닐까 생각된다.
은수는 시나리오 작가·연출 지망생이다. 장편 극영화 ‘입봉(영화계 용어로 데뷔)’은 아직 못한 처지다. 은수가 원래 만들고 싶은 건 좀비 영화(읽고 있는 책·논문 뭉치 중 눈에 익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영화 <곡성> 시나리오 출력물 따위)였다. 잘 안 풀렸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대상을 타면 상금도 받고 제작비도 건지는데 대상(大賞)은 다른 사람의 몫. 집필 환경도 그리 좋지 않다. 부모와 여동생은 마지막으로 도전하는 셈 치고 거실에 커튼을 쳐 은수가 작업방을 만들 수 있게 도왔다. 떨어지면 취직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봐야 한다.
층간소음을 넘어 뭔가 수상한 윗집
작업환경이 안 좋은 점은 또 있다. 시시때때로 윗집 501호에서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소리. 층간소음이다. 노이로제에 걸릴 수준이다. 은수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막대기에 고무장갑을 씌워 천장을 퉁퉁 쳐보지만, 윗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랫집 301호도 난리다. 층간소음 때문에 애가 잠을 못 자 칭얼댄다고 젊은 아기엄마가 와서 항의한다.
윗집, 뭔가 수상하다. 은수는 악몽을 꾼다. 어느 날 윗집 중년 아저씨 소유의 승합차에 잠입한 은수는 피 묻은 작은 칼을 발견한다. 거기에 정체불명의 신흥종교 경전. 중년 아저씨의 성은 정씨인데, 부동산 사이트에서 발견한 윗집 주인은 이씨다. 뭔가 음모가 있는 건 아닐까. 취업준비생인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윗집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은수의 노력이 시작된다. 신흥종교를 추론해낸 이유는 예컨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들려오던 소음이 일요일만 되면 뚝 그쳤기 때문이다. 층간소음은 점점 더 심해질 뿐만 아니라 은수가 올려본 천장엔 물까지 새 얼룩이 바야흐로 번지는 중이다. 이 윗집 아저씨, 도대체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2020년쯤 공개한 시놉시스에 따르면 영화는 ‘층간소음 문제로 불거진 아래층 작가 지망생과 윗집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로 소개됐다. 2년이 지난 올해 3월 연쇄살인마는 그냥 살인마로 변경됐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층간소음을 다루는 전형적인 괴담의 특징이 밤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못 잤는데 ‘알고 보니 윗집은 텅 비어 있은 지 오래였다…’와 같은 이야기인데, 이 영화 속 윗집 남자는 그런 유령 따위는 아니고 ‘불치병을 앓고 있는 딸을 둔 신흥종교 신도’라는 뭔가 상대하면 안 될 것 같은 음침한 캐릭터다.
시나리오 작가가 경험한 살인사건?
영화가 마냥 진지하지는 않아 혹시 이 모든 것이 시나리오 응모전을 앞둔 은수의 신경증적 반응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에 주목해 스토리를 따라갔는데 안타깝게도 영화는 예상대로의 결말로 흘러간다. 말하자면 스릴러영화 장르를 표방하고 있는데 관객들에게 어떤 것이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주는지에 대한 연구는 살짝 부족하다고나 할까.
주인공 은수가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미끄러지고 난 뒤 친구는 그에게 “당선작보다 네 작품이 더 좋다”며 “너의 주변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보라”고 추천한다. 영화 엔딩 장면의 대사는 이렇다. “내가 상상한 이야기는 현실을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써보려고 한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엔딩크레딧 롤에서 이청순이라는 작가 이름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씨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 모든 영화가 사소설(私小說) 같은 이야기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다. 사건과 상황에 작가의 경험 내지는 취재가 투영돼 있을 수는 있지만-예컨대 봉준호 감독이 영화 <괴물>(2006)을 찍을 때 주한미군 오염물질 무단방류 실태를 파악하려고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을 방문해 취재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유명하다-‘현실을 뛰어넘는 상상한 이야기’는 자주는 아니지만 꽤 있고, 그 놀라운(fabulous) 이야기에 매료된 관객들을 사로잡아온 것이 이제 13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영화라는 대중예술 장르를 지금까지 지속하게 한 힘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꾸 떠오르는 영화들이 이탈리아의 지알로(Giallo)물이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서스페리아>(1977·사진)를 보면 무용학교에 들어온 미국인 소녀가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코골이 소리를 듣는다. 또 퇴근해야 할 선생님들의 발소리가 거꾸로 안쪽으로 향한다. 알고 보니 그 무용학교가 진짜 마녀들의 본거지였다는 건데 지알로물의 특징 중 하나가 개연성이나 각본의 치밀함보다 강렬한 대비와 잔혹한 설정 따위다. <수정깃털의 새>(1970)의 미국인 주인공은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우연히 목격한다. 범인은 연쇄살인마였고, 주어진 단서는 범인이 낀 검은 장갑이었다. 소위 지알로물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자칫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큰 주인공이 경찰과 같은 공권력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위기를 돌파해 사건을 해결해간다는 설정이다. 주인공이 피칠갑이 돼 사건을 해결해놓은 그제서야 뒤늦게 삐뽀삐뽀 경광등을 울리며 경찰이 요란하게 도착한다는 식의 결말.
앞서 언급한 <서스페리아>는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마녀 3부작 영화(마녀를 주제로 한 그의 또 다른 영화들은 <인페르노>(1980), <눈물의 마녀>(2007)다) 중 하나인데 분명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 영화들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지알로 공포영화들은 B급 영화로 불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변태 내지 이상성욕자 취급을 받더라도-그의 영화 속 등장하는 살인을 저지르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은 모두 감독 자신이 직접 연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꿋꿋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감독의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2000년대, 정확히 말하면 1996년 메타장르영화인 <스크림>(웨스 크레이븐 감독) 이후 주류장르로 편입된 공포 장르를 연출하려는 감독들에게선 쉽게 발견하기 힘든 정신이기도 하다. 쓰다 보니 꼰대 같은 소리를 덧붙인 셈이 돼버렸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