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산업·농업 생산·공급까지 차질 유발… 인플레이션 압박 가중시킬 듯
지구촌 곳곳이 ‘역대 최고 가뭄’ 기록을 새로 써내려가고 있다. 라인강, 양쯔강을 비롯한 큰 강의 수위가 위험한 수준으로까지 낮아지며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물 사용에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더 나아가 올여름 가뭄은 수운과 산업 생산에 차질을 빚으며, 공급 병목과 생산비용 상승도 유발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17일(현지시간) 독일 빙겐에서 촬영한 라인강의 모습. 가뭄으로 강물이 바닥을 드러내며 본래 섬에 있던 탑까지 걸어서 갈 수 있게 됐다. / AFP연합뉴스
곳곳에서 바싹 말라가는 강물 영국 웨일스 북부 포이스 카운티에서 약 140년 전 사라졌던 랜위딘 마을이 최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고학적 발굴도, 대대적인 공사도 없었다. 랜위딘 마을을 세상으로 꺼낸 건 ‘가뭄’이다. 랜위딘 마을은 1891년 인공 저수지 비른위호가 완공되면서 수몰됐다. 그러나 영국 전역에서 폭염으로 인한 가뭄이 이어지며 하천과 저수지가 메말랐고, 비른위호의 수위도 급격히 낮아지며 랜위딘 마을 유적이 드러났다. 이 마을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역시 가뭄이 심각했던 1976년 이후 처음이다.
스페인에선 아예 고대 로마 군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페인 오렌세에 있는 아스 콘차스 저수지의 강변 제방이 싹 마르면서 기원후 약 120년 로마군이 사용한 요새가 지난 8월 11일(현지시간) 나타났다. 1949년 저수지 건설을 시작한 이후 통상 물에 잠겨 보이지 않거나 일부만 드러났던 유적이지만, 이달 역사상 가장 건조하고 뜨거운 8월을 기록해 저수지 유량 49%가 사라지면서 전체 유적이 물 밖으로 나왔다.
1288㎞로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라인강의 상황도 좋지 않다. 라인강은 독일을 관통하며 서유럽 곳곳을 잇는 젖줄로, 서유럽 내륙 수상 운송의 80%와 독일 내 에너지 운송의 30%를 담당한다. 최근 라인강 수위는 바지선을 운항하기 위한 마지노선인 ‘수위 40㎝’를 위협받고 있다. 독일연방수문학연구소(BfG)는 지난 8월 12일 기준 주요 수위 측정 지점인 독일 카우프의 수위가 40㎝라고 밝혔고, 머지않아 30㎝ 미만으로 더 낮아지리라는 관측을 내놨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포강의 유수량은 평시 대비 10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사정 역시 녹록지 않다. 미국 최대 인공호수 미드호가 역대 최저 수위로 내려가면서 물 밑에 있던 변사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륙정, 난파 보트가 연이어 발견되고 있다. 미드호 수위는 미드호에 물을 채우기 시작한 1937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CNN에 따르면 미드호는 통상 약 3000만에이커(약 12만1405㎢)가 물로 채워지지만, 현재는 그 40% 수준인 1200만에이커(약 4만8562㎢)에 불과하다.

8월 11일(현지시간) 스페인 오렌세에 있는 아스 콘차스 저수지가 가뭄으로 인해 수위가 낮아지며 고대 로마 군영이 드러나 있다. / EPA연합뉴스
골프·불꽃놀이·맥주는 급하지 않다 물이 귀해지다 보니 자연히 물 사용에도 예민해졌다. 프랑스에선 골프장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송수관이 말라 마실 물을 구하기 힘든 지역도 있는데, 일부 지자체에서 골프장은 물 사용 제한 적용을 면제받았기 때문이다. 이달 중순 프랑스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그린의 홀을 시멘트로 메우고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송수관을 막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이 홀은 하루 27만ℓ의 물을 마시는데, 당신은 그만큼 마시나요?” 등 메시지를 내보냈다.
독일은 최근 연례행사 ‘라인강 불꽃놀이’에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소방 호스로 물을 끼얹는 모습이 포착돼 도마 위에 올랐다. 라인강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불꽃놀이를 하자고 물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비판이 야당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일었다. 이밖에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선 정부가 샤워 횟수를 줄여라, 미용실에서 손님 머리는 한 번만 감겨라, 잔디에 물을 주지 말고 세차도 하지 말아라 등 ‘사소한’ 용도까지 규제하고 나섰다.
코로나 맥주를 비롯해 세계 최대 맥주 수출국 중 하나인 멕시코는 주류 생산 중단에 나섰다. 지난 8월 13일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주류업체에 맥주 등 주류 생산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북부에서 상대적으로 수량이 풍족한 남부로 주류 공장을 옮겨달라고도 당부했다. 가뭄이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멕시코에선 생수 사재기를 넘어 공용 물탱크 습격까지 벌어지고 있다. 멕시코수자원공사는 현재 멕시코의 41%가 가뭄 상태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가뭄, 경제적 악재 이번 가뭄은 산업·농업 생산과 공급에 차질을 유발하며 인플레이션 압박을 가중시킬 전망이다. 독일 라인강 유역에선 공업용수가 부족해 공장 가동률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현지 매체 도이치벨레(DW)는 지난 8월 16일 “기업들이 이미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는 홀거 뢰쉬 독일산업연맹(BDI) 부국장의 우려를 전했다. 뢰쉬 부국장은 “장기간 가뭄과 낮은 수위가 산업 공급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 공급 병목 현상과 노동시간 감축이 유발될 수 있고 일부 산업 부문은 중단될 수도 있다”며 “공장이 꺼지고 운송이 멈추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밝혔다. 운송 비용 상승도 현실화됐다. 정보분석업체 인사이츠글로벌은 라인강으로 스위스 바젤까지 경유를 운송하는 비용이 지난 6월 초 1t당 25유로에서 지난 8월 10일 267유로로 10배 이상 폭등했다고 밝혔다. 유럽 내륙 수운이 연간 800억달러(약 104조4000억원)의 비용 감소 효과(블룸버그)를 내왔던 만큼, 라인강을 통한 수송이 멈추면 운송 비용 인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8월 16일(현지시간) 중국 충칭시 양쯔강 유역이 지난 가뭄으로 바닥을 보이고 있다. / AP연합뉴스
역대 가장 긴 폭염을 기록 중인 중국에서도 산업이 타격을 입고 있다. 국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쓰촨성의 평균 강수량은 전년보다 51% 줄어 양쯔강 수위가 크게 낮아졌다. 전력 생산의 80%를 수자원에 의존하는 쓰촨성으로선 전력 공급에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쓰촨성은 현대자동차 중국 법인을 비롯해 전력 소비가 큰 기업에 생산 중단을 지시했고 도요타, 폭스콘 등도 가동을 중단했다. 쓰촨성은 세계 1위 배터리 업체 CATL과 애플워치를 만드는 폭스콘, 도요타 공장 등이 밀집한 대표적인 제조업 지역이기 때문에 글로벌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식품 쪽으로 눈을 돌리면, 단적인 예로 케첩을 구경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가뭄 탓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토마토 평균 재배 비용이 1에이커당 4800달러로 10년 전 2800달러에서 71% 상승했다(캘리포니아 농업회사 울프파밍). 캘리포니아 토마토 경매가는 1t당 105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해 시장조사업체 IRI는 지난달 토마토소스 가격이 전년 동기 대비 17%, 케첩은 23% 올랐다고 밝혔다. 폭염으로 미국, 중국, 이탈리아에서 2050년까지 토마토 생산량이 6% 감소하리라는 전망(지난 6월 ‘네이처’ 식품 연구)도 있다.
<김서영 국제부 기자 westzer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