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소설과 경제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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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로 읽는 경제

지구촌 전역의 돈 풀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잿값이 폭등하면서 고물가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이란 쌍둥이 후폭풍이 연일 우리 뒤통수를 후려친다. 수출주도경제에 목맨 한국경제로선 걱정이 태산이다.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고 SF 또한 문학의 한 갈래다. 그렇다면 SF는 경제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일까? ‘과학소설’이라 하면 선뜻 경제 관련 키워드가 떠오르는가? 우주선과 외계인 그리고 온갖 특수효과로 치장한 액션만 떠오른다면 당신이 과학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노자키 마도의 <Know> / 영상출판미디어

노자키 마도의 / 영상출판미디어

문학은 욕망을 다룬다. 그중에서도 과학소설은 개인 대신 사회와 이해집단들(혹은 인류 전체)의 욕망을 다룬다. 개인의 감정변화보다 세상의 흐름과 변화 포착이 SF의 주된 관심사니까. 로벗 A. 하인라인의 중편 ‘달을 판 사나이’가 단적인 예다. 인류가 달에 진출하면 다양한 사업기회가 열리긴 하겠지만 누구나 당장은 뜬구름 잡는 먼 이야기라 여기던 20세기 중반… 어느 사업가가 나타나 판도를 바꾼다. 달에 다이아몬드 원석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짓 여론을 만들어내자 너도나도 기술개발에 나서 우주산업이 아주 짧은 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진지한 접근도 있다. 프레데릭 폴과 시릴 M. 콘블러스의 장편 <우주상인>은 대기업들과 그 앞잡이 선동회사들의 악의적 소비자 조작과 인간적 가치의 무시를 일관되게 비판하면서 산업사회가 지속적 경제성장의 덫에 걸려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을 지적한다. 경제에 대한 관심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도 발견된다. 지금도 유토피아 문학은 경제와 정치권력 그리고 사회정의란 3자 관계를 놓고 나름의 해결책을 고민한다. 에드워드 벨라미의 장편 <뒤를 돌아보면서>가 유명한 예다. 자동화 기술로 경제적 평등이 구현된 테크노유토피아 세계상에 매료된 나머지 한때 미국 안팎에 수백개의 벨라미 클럽이 생겨났다.

20세기 과학소설 가운데 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정작 가장 냉소적이었던 부류는 1980년대 등장한 소위 사이버펑크(그리고 바이오펑크)다. 이 소설들은 자본독점과 그 폐해를 신랄하게 까댄다. 이를테면 루이스 샤이너의 ‘프론테라’는 화성 식민화 과정에서 대기업과 정부의 고질적 유착관계를 포착하며, 브루스 스털링의 ‘선글라스를 쓴 모차르트’는 미래의 대기업이 시간터널로 침입해 중세유럽의 경제와 고유문화를 수탈하는 과정을 담는다.

21세기 IT와 나노공학 기반 정보화 사회를 내다본 소설들도 소위 ‘정보자본주의’가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할까봐 우려한다. 말카 올더의 <정보민주주의>는 웬만한 나라보다 비대해진 다국적 기업 탓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실을 그리며, 노자키 마도의 <Know>는 네트(Net)에 접속해 정보를 끌어모으는 능력이 곧 새로운 사회의 계급이며 이는 기존의 정치경제계급과 직결됨을 시사한다.

과학기술을 독점한 재벌기업이 세상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미래를 아슬아슬한 시선으로 그린 의도가 뭘까? 그저 있을 법한 미래예측이라서? 아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현대 자본주의사회 작동 메커니즘의 불공정성을 알리기 위함이다. 과학기술논문은 과학문명의 잠재력을 찬양하고 말지만, 과학소설은 그것이 실제 경제에서 어떻게 돌아가며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곱씹는다.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본분 아니겠는가.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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