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느림의 음료다. 속도보다는 깊이와 방향, 가치를 추구한다. 커피의 테마가 ‘각성’이라면 차(茶)는 ‘치유와 고요함’이 특성이다. 티소믈리에 정승호(51·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 원장)의 삶도 오래전 궤도가 수정됐다. 화려함보다 깊이와 질(質)을 추구하게 됐다. 차가 건넨 선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차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향기를 지녔다”고 말했다. 중국 윈난성의 보이차는 쓴맛과 떫은맛이 강하다. 그해에 만들어진 차는 마시기 어렵다고 한다. 통상 5년은 지나야 겨우 마실 수 있는 정도가 된다. 제맛을 내려면 20년이 돼야 한다. 최고의 맛을 인정받으려면, 심지어 30년 이상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런 보이차에는 묘하게 깊은 맛이 있다. 한번 넘긴 차의 맛과 향이 다시 목으로 코로 되돌아 나온다. 이것을 ‘회운(回韻)’이라고 한다.
캐나다에서 로네펠트 티에 반하다 정승호는 지난 20년간 한국 차 시장의 압축된 변화 과정을 지켜봤다. 차는 기다림의 가치가 깃든 전통이지만, 이미 산업화의 길에 들어선 지 오래다. 그는 그 양상에 주목한다. 차는 커피의 진화를 뒤따라 걷고 있다. 그가 보기에 커피보다는 다소 더디고, 부침과 굴곡이 많은 과정이다.
젊은 시절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 시점에 바로 차의 세계가 눈앞에 나타났다. 미국 유학 시절 경영학을 공부했고, 캐나다 회계법인과 은행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20대 후반 IT 기업 오라클(Oracle Corporation)에서 프로젝트 매니저 일을 수행했다. 승승장구, 아주 빠르게 성공했다. 오라클은 기업용 통합 시스템을 제공하는 회사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아우르며, 특히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바쁘게 일하던 젊은 시절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1999년 오라클 한국지사에서 한 대기업의 ERP(전사적자원관리) 구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금융팀에서 일할 때는 국내 두 시중은행의 통합 작업에도 참여했다. 굵직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맡았다. 한편으로는 성공한 삶이었지만 마냥 행복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늘 일이 생활을 압도했고,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기도 전에 고객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다. 트렌드는 너무 빨리 변했고, 그 개념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본사와 한국지사를 숨 가쁘게 오갔다. 스타벅스가 다운타운가 큰 건물 1층을 잠식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객 10명 중 3명이 차를 마시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 시장과 공존하는 차 시장의 전망을 희망적으로 보게 됐다.”
차는 전혀 알지 못했다. 차보다는 커피 문화에 익숙했다. 스타벅스가 들어오기 전에는 한 외국계 기업에 커피숍 투자자문을 해준 적도 있었다. 차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로네펠트 티하우스(Ronnefeldt Teehaus)’의 한국 판권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출장길에 부모를 만나러 잠시 캐나다에 들렀다가 이 브랜드를 알게 됐다.
“어머니가 로네펠트 티를 챙겨주면서 마셔보고 선물도 하라고 권했다. 그 맛에 반했고, 한국에 없다는 말에 눈이 확 뜨였다.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로네펠트 본사에 한국 판권을 달라고 제안서를 썼고, 얼마 후 일본에서 미팅을 하자는 답장이 날아왔다.”
로네펠트는 1823년 독일에서 창립됐다. 최상급 차만을 생산하며, 모든 생산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전통적인 제법(Orthodox Method)을 사용해 섬세한 맛을 그대로 살린다. 작은 규모의 로컬 차 회사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한 케이스다. 정승호는 차를 마시는 대중의 눈높이와 수준이 과거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른 업계의 판도 변화도 불가피하다고 본다.
“홍차 시장의 경우 저가의 영국 브랜드, 주로 티백을 찾았던 대중의 기호가 바뀌고 있다. 커피와 마찬가지로 스페셜티(specialty)급의 차를 찾는 고객이 늘었다. 그들은 브랜드에 의존하지 않고, 산지의 차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안목과 기대감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산지에서 엄선된 차를 직접 가져와 제품화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연구원을 세우게 된 배경도 그런 맥락이다. 차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키우려는 시도였다.”
차는 크게 ‘차나무의 차’와 ‘차나무의 차가 아닌 차’로 나뉜다. 학명이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로 불리는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가 전통차다. 그 밖의 차는 대용차로 부른다. 우열은 가릴 수 없다. 다만 허브 등 대용차는 전통차의 특별한 효용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대중에게 어필한다. 용도와 효용이 비교적 분명하다. 진정 효과, 면역력, 풍부한 비타민이나 미네랄 등을 내세운다. 티 회사들은 소위 ‘웰니스(wellness) 시장’을 주목한다. 대용차의 효용과 기능에 따른 성장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매기고 있다. 정승호는 커피와 차의 분기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커피의 효용은 ‘각성’ 효과에 있다. 차는 각성의 효용도 물론 있지만 주로 진정 효과에 더 큰 가치를 둔다. 각성 음료 시장은 워낙 크다. 그래서 에너지 드링크 시장이 형성돼 커피를 위협하고 있다. 차는 에너지 음료와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렵다. ‘각성’이란 효용으로 시장을 주도한 적이 없다. 미국과 유럽의 다운타운 커피하우스는 보통 4~5시경이면 문을 닫는다. 오전과 오후 커피를 집중적으로 마시고, 그 시간 이후에는 자제한다.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차와 커피의 효용을 구분하지 않고 마시는 경향이 강하다.”
12년간 티소믈리에 5000여명 배출 정승호는 소믈리에를 양성하고, 기업과 카페 창업자의 컨설팅에 응한다. 지난 12년간 5000명 정도의 티소믈리에를 배출했다. 매년 400~500명의 학생이 새로 등록한다. 지난해 수입한 다양한 차 규모는 무려 25t에 달한다. 통관할 때 각종 품질검사 비용으로 연간 수천만원이 든다. 그가 보기에 한국처럼 차 수입에 관세가 높고, 국가 차원에서 까다로운 검사를 요구하는 나라는 드물다. 좋은 점도 있지만 우려할 점도 있다. 한국 차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싱가포르와 한국의 경우를 그는 이런 잣대로 비교한다.
“싱가포르는 차를 전혀 재배하지 않지만 세계 차 무역의 중심국이다. 좋은 차를 수집해 기획하고 리패키지, 디자인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세계 최고의 브랜드를 많이 갖고 있다. 전통적인 차 산지는 5개 권역으로 구분한다. 인도, 중국, 스리랑카, 일본, 대만이다. 사실 한국은 지리적으로 이들 5개 국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나라다. 생산되는 차의 질도 매우 우수하다. 생산량이 너무 적고 가격이 비싸다. 차 구매력이나 차 문화 전반도 아직은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 산업 육성 방안에 눈을 떠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차밭을 조성하고 수확하기까지 15년 이상이나 소요된다. 확대의 여지, 투자 여력은 있다. 한국 산림은 부가가치가 떨어진다. 그곳에 차밭을 조성하는 방법이 있다. 차를 관광 등 다른 부문과 접목해야 한다. 이른바 6차 산업인데 이미 활성화된 곳이 많다.”
싱가포르가 세계 차 무역의 중심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차 생산량이 전무하기 때문에 자국의 재배 농가를 보호하는 국가 차원의 규제가 없다. 전 세계의 모든 차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오픈 마켓이다. 차를 소비하는 대중의 수준도 높고 구매력도 왕성하다.
TWG는 1837년 싱가포르 상공회의소 설립을 기념해 설립한 대표적인 차 브랜드다. 동서양 차 무역의 중심이 된 싱가포르의 역사를 상징한다. TWG는 전 세계의 다원과 독점계약을 맺고 신선한 찻잎을 공급받는다. 장인들이 만들어낸 차가 10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신흥 산지는 주로 아프리카권에 형성돼 있다.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르완다 등 동아프리카 벨트 국가들이다. 케냐가 그 중심이다. 아시아권은 네팔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이 꼽힌다.
“지나친 보호와 규제는 차(茶) 산업의 발전에 이롭지 않다. 자동차 시장을 개방해 외제차가 지천이 됐지만, 그 결과 한국 자동차의 세계 경쟁력은 일취월장했다. 김대중 정부 때 일본문화를 개방한다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그게 한류문화 전파의 기폭제가 됐다. 수입이 완전 자유화된 커피의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우리 브랜드로 수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차 산업도 자유롭게 경쟁해야 체질이 강해진다.”
전 세계 차 산업 중심에 있는 ‘호레카’ 정승호는 로네펠트 티하우스의 한국 판권을 갖게 되면서 6성급 호텔의 호텔리어에게 차 강의를 시작했다. 차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공부했다. 세계 주요 차 산지를 모두 방문했다. 각국 주요 도시의 호텔과 레스토랑, 카페에서 현지인의 차 문화를 연구했다.
“전 세계 차 산업의 중심에는 ‘호레카’가 있다. 호텔과 리조트, 레스토랑과 카페다. 호스피탈리티 산업(hospitality industry·환대산업)의 주축을 이루며, 동시에 차의 하이엔드 시장이 펼쳐지는 무대다. 각 분야의 선두를 달리는 초거대 기업의 경쟁이 치열하다. 새로운 호텔 브랜드를 세우거나, 로열티 프로그램을 통해 브랜드를 차별화한다. 기업을 인수·합병하면서 다이내믹한 성장을 추구한다. 이곳에서 차 산업과 문화가 어떻게 전개되고 서로 경쟁하는지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를 해보니 차 산업의 수준은 국가의 품격과 비슷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지난 몇년간 이 분야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를 <호레카 속 티의 세계>라는 2권짜리 단행본으로 기획했다. 7월 중 출간 예정인 제1권은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을, 2권은 인도·오세아니아·아시아·북남미 지역을 다룬다. ‘파인 다이닝과 티의 명소’를 중심으로 소개하며, 각 분야 전문가들이 펼치는 관련 산업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기회만 되면 차의 산지로 날아갔다. 처음엔 인도 다르질링에 너무 가고 싶었다. 콜카타공항에 내리면서 오지 탐험이 시작됐다. 2004년 무렵이다. 이런 데서 차가 나오는구나 하는 엄청난 문화적 쇼크를 받았다. 거대한 차밭이 펼쳐졌다. 눈에 보이는 몇개 능선 전체가 차밭이었다. 현지 방갈로에서 마셨던 차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곳의 온갖 나무와 다양한 풀, 공기와 햇빛이 찻물 속에 녹아든 것 같았다.”
지금도 정승호의 책상 위에는 여러 종류의 다르질링 차 봉지가 있다. 홍차의 샴페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차다. 다르질링은 티베트어로 ‘번개와 천둥이 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습도가 높고 기온차가 커 이 홍차의 독특한 맛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바, 기문과 더불어 세계 3대 홍차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가볍고 섬세한 맛, 머스캣 포도향이 특징이다. 밝고 옅은 오렌지색으로 우러나온다. 5~6월에 생산되는 두물차(2nd Flushing)가 최고급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베리에이션 티를 즐긴다. 스타벅스도 3~4개월마다 한 번씩 새로운 베리에이션 티를 선보인다. 아직은 응용 메뉴에 치중한다. ‘티(Tea)’라는 존재가 관심을 끄는 코드임은 스타벅스가 감지했다. 차 본연의 맛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메뉴를 집중적으로 내놓고 있다. 차 전문 회사를 여러개 인수하기도 했다. 20년 전 커피도 그랬다. 달달하고 우유가 많이 들어간 음료가 인기를 끌었다. 2007년에 전파를 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판도를 바꿨다. 로스터리 카페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됐다. 그때부터 커피 본연의 맛을 찾게 됐다. 불행하게도 그 무렵 차 업계는 수입 중국차의 농약 문제로 된서리를 맞았다. 그게 우리 차 산업의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커피는 날았고, 차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상황은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차, 커피의 진화 순서 밟을 듯” 요즘 커피 마니아는 대형 프랜차이즈보다 작아도 맛이 좋은 커피 전문점을 찾는 경향을 보인다. 차를 찾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차 본연의 맛, 산지 중심의 질 좋은 차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리란 전망이다. ‘트리거(trigger·기폭제)’라는 표현을 썼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같은 커피 시장의 방아쇠가 차 시장에도 격발되리란 관측이다. 이런 논리다.
“커피의 진화 순서를 밟고 갈 것으로 본다. 정통성을 지키는 티 전문점들이 생겨날 것이다. 무조건 비싸다고 좋은 건 아니다. 아주 작은 규모라도 상관이 없다. 우리 차 시장의 구매력과 소비패턴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런 시장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의 몸은 내추럴하다. 결국 자연스럽고 맛있는 것을 찾게 돼 있다. 차는 붐보다 저변이다. 커피보다는 늦은 속도로 간다. 사회가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돈을 벌겠다고 밤새워 일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차는 ‘안정의 시대’에 사람들이 찾는 음료다. 커피는 이미 완벽한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이제 차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한기홍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