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의 ‘잔디 사랑’ 위협하는 기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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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지역 가뭄으로 야외 물 소비 활동 제한

“아메리칸 드림은 흰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울타리와 집 앞의 드넓은 잔디밭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죠. 하지만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바뀔 필요가 있고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서쪽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회사인 ‘라스비즈니스수역’의 총지배인 데이비드 페더슨은 워싱턴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에 물을 공급하는 미드호가 여러해 이어진 가뭄으로 저수량이 줄면서 지난 5월 10일(현지시간) 갈라진 호수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 볼더시티|AP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에 물을 공급하는 미드호가 여러해 이어진 가뭄으로 저수량이 줄면서 지난 5월 10일(현지시간) 갈라진 호수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 볼더시티|AP연합뉴스

실제로 미국인들의 잔디 사랑은 유별나다. 거대한 정원을 갖고 있는 대저택은 말할 것도 없고 서민들이 주거하는 작은 단독주택이나 타운하우스에도 잔디밭이 딸려 있다. 먹지도 못하는 잔디를 키우는 데 쏟는 시간과 정성은 미국식 여유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 서남부 지역을 수년째 괴롭히고 있는 지독한 가뭄은 미국인들의 잔디 사랑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4월 라스비즈니스수역에 수돗물 원수를 공급하는 ‘남캘리포니아 메트로폴리탄 수역(MWD)’은 로스앤젤레스, 벤투라, 샌버나디노 카운티 일부 지역에 강제 절수 조치를 예고했다. 오는 6월 1일부터 1인당 하루 물 소비량을 80갤런(약 303ℓ) 이하로 제한하거나, 정원에 물 주기, 세차, 풀장에 물 채우기 등 야외 물 소비 활동을 주 1회로 제한하는 것 중 택일하라는 내용이다. 이 조치의 영향을 받는 주민은 600만명에 이른다. 부자 동네들은 1인당 하루 물 소비량이 80갤런을 훌쩍 넘기 때문에 야외 물 소비 활동 제한을 선택했다. 라스비즈니스수역의 경우 소비자 한사람의 하루 평균 수돗물 소비량이 200갤런에 달한다.

최악의 경우 9월부터 야외 물 소비 금지

이 회사 직원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매일 담당 구역을 돌며 수돗물을 과도하게 쓰는 소비자들과 입씨름을 한다. 곤살레스는 주민들에게 6월 1일부터 조경에 사용하는 수돗물을 평소보다 35% 줄여야 한다면서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9월부터 야외 물 소비 활동을 완전히 금지할 수 있다고 공지했다. 그는 “이 동네 사람들은 수십만달러를 조경에 아낌없이 쏟아붓는다”면서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나무와 잔디가 말라죽어도 놔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수돗물의 70~80%를 조경에 사용한다. 조경에 사용하는 물만 줄여도 물 사용량을 5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대륙 서남부 지역의 가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기상학자들은 2000년부터 이 지역의 가뭄을 기후변화에 의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라고 본다. 지난 2월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이 겪고 있는 가뭄은 지난 1200년 사이에 최악이다. 특히 캘리포니아는 지난 3년 동안 바짝 마른 기후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말 폭풍이 몰아닥치면서 일시적으로 많은 눈과 비가 내렸지만, 올해 들어 다시 최악의 강수량을 기록 중이다. AP통신에 따르면 올해 1~3월 캘리포니아는 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건조했다. 네브래스카대와 농무부, 국립해양대기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가뭄모니터’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는 주 면적의 95.1%가 심각한 가뭄 지역으로 분류된다.

봄가뭄이 극심해지면서 주요 취수원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랐다. 캘리포니아의 대형 저수지들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쌓인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건조한 여름철 물을 공급받는데 4월 1일 현재 시에라 네바다에 쌓여 있는 눈은 평년 대비 35%에 불과하다. 오로빌 저수지의 경우 1970년대에 저수지를 건설한 이후 저수위가 최저를 기록했다. 후버댐에 의해 조성된 미국에서 가장 큰 미드 저수지는 물이 마르는 바람에 강바닥에 있는 취수구가 저수지 건설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MWD의 총지배인 아델 하게카릴은 “지난 3년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최악이었다”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활용해온 물을 얻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가뭄의 정도를 나타내는 미국 지도에 서남부 지역의 극심한 가뭄 상황이 표시돼 있다. 노란색은 ‘건조’ 상태로 분류된 지역이다. 붉은색이 진해질수록 가뭄의 정도가 심하다는 뜻이다. / 미국 가뭄모니터 / 원자료 주소 https://droughtmonitor.unl.edu

가뭄의 정도를 나타내는 미국 지도에 서남부 지역의 극심한 가뭄 상황이 표시돼 있다. 노란색은 ‘건조’ 상태로 분류된 지역이다. 붉은색이 진해질수록 가뭄의 정도가 심하다는 뜻이다. / 미국 가뭄모니터 / 원자료 주소 https://droughtmonitor.unl.edu

가뭄과 뗄 수 없는 게 산불이다. 가뭄과 고온으로 대지와 삼림이 바짝 마르면서 해마다 대형 산불이 남서부 지역을 강타하고 있다. 올해는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등의 주에서 때 이른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가뭄모니터는 “캘리포니아와 서남부가 건조한 가운데 강한 바람이 불고 있다”면서 “바람이 불고 건조한 기후는 전형적으로 산불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한다”고 경고했다.

미국 서남부가 매년 가뭄과 산불로 고생하고 있다고 해서 이 지역이 당장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환경공학자인 제이 런드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캘리포니아의 지속적인 가뭄으로 주요 도시지역이 물 부족을 겪고, 특히 많은 물을 사용하는 농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기는 하겠지만 미국은 가뭄에 대처해온 오랜 역사와 노하우가 있다고 말했다. 인위적인 절수 조치를 통해 물 소비를 억제하고, 상대적으로 수자원이 넉넉한 이웃 지역에서 물을 사오거나 사용한 물의 재사용, 바닷물 담수화 등의 조치를 통해 공급을 늘릴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네바다주는 ‘비기능성’ 잔디밭 불법화

그런 변화의 첫 번째 타깃이 바로 정원과 잔디밭이다. 애지중지 가꿔오던 잔디와 정원수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집주인의 마음은 심란하다. 라스비즈니스수역으로부터 수돗물을 공급받는 주민 짐 햄튼은 자신과 이웃들이 강제 절수 통보를 받고 화를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짐은 “물이 완전히 끊길 수 있다는 내용을 듣고 최종 통보의 느낌을 받았다”며 자신의 집 마당의 잔디가 이미 부분부분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수돗물 가격을 올리고, 야외 물 활동을 제한했음에도 잔디와 조경에 쓰이는 물이 줄지 않자 이를 원천봉쇄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애리조나와 네바다 등의 주는 기존에 깔린 천연 잔디를 없애는 주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네바다는 한발 더 나아가 잔디경기장 등 본연의 기능이 있는 곳을 제외한 ‘비기능성’ 잔디밭을 아예 불법화했다. 이에 따라 네바다 주민들은 오는 2027년까지 기존의 관상용 잔디를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 곤살레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불평하는 게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물로는 식물을 키울 수 없다는 점”이라면서 “우리는 식물이 사람의 생명만큼 필수적이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 활동이 부메랑이 돼 돌아온 기후의 극단화가 일부 미국인의 잔디 가꾸기 습관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 그칠지 두고 봐야 할 시점이다.

<김재중 워싱턴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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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