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새벽배송과 로켓배송이 있다면, 미국에는 아마존 배송이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예전처럼 마트나 쇼핑몰을 찾기 어려워진 수많은 미국인은 아마존에 일상을 사실상 의탁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상거래 기업인 아마존은 지난해 초 매출이 40% 이상 급증하며 ‘유통 공룡’ 입지를 굳건히 했다.

미국 뉴욕시 스태튼아일랜드의 아마존 물류창고 JFK8 전경. JFK8 노동자들은 지난 4월 1일(현지시간) 노조 설립 찬반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찬성 54%, 반대 43%로 노조 설립을 가결했다. / AP연합뉴스
아마존은 미국에서 월마트에 이어 민간 고용주로는 두 번째로 많은 1100만명을 직원으로 두고 있다. 1994년 설립 이래 30년 가까이 아마존에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가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온 탓이다.
이런 아마존에 최근 작지만 중대한 균열이 생겼다. 아마존 역사상 처음으로 뉴욕시의 한 물류창고에서 노조를 결성했다. 비록 미 전역 100여개 아마존 창고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신생 아마존 노조(ALU)가 갖는 의미는 ‘100분의 1’을 훨씬 뛰어넘는다.
평범한 30대 생활인, 아마존 역사 쓰다
‘1호’ 아마존 노조가 둥지를 튼 곳은 뉴욕시 스태튼아일랜드의 아마존 물류창고 JFK8. 미국 내 아마존 창고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창고노동자 8000여명이 이곳에서 뉴욕 시민 840만여명에게 전달할 각종 물품을 신속하게 분류, 배송기사들에 전달한다.
지난 4월 1일(현지시간) JFK8 창고에서의 노조 설립 투표결과, 투표에 참여한 4850명 가운데 찬성 2654명(54%), 반대 2131명(43%)으로 노조 설립이 가결됐다고 미국 노동관계위원회(NLRB)가 밝혔다. 노조 설립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불과 11개월 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변의 연속이었다. 노동자들은 자금, 권력, 명성 등 모든 면에서 사측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노조 결성을 주도한 이들도 노회한 조직화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존 노조의 리더인 크리스천 스몰스와 데릭 파머는 2020년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해고된 30대 청년들이다. 사측이 노동운동의 ‘얼굴’로 주목한 스몰스는 한때 래퍼로 활동하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마존에 취업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이었다.
이들은 거대 상급노조와 손을 잡지 않았다. JFK8보다 먼저 노조 설립을 추진한 앨라배마주 배서마 창고의 경우 소매·도매·백화점노조(RWDSU)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스몰스는 배서마 창고를 방문한 뒤 기성 노조에 의지하는 대신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했다.
아마존 역사를 새로 쓴 ‘풀뿌리’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틱톡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적극 활용했고, 일터인 창고 앞 천막이나 직원들이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에서 동료들을 직접 만났다.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에 다가가는 전략을 썼다.
사측이 “똑똑하지 못하고 말도 어눌하다”고 평가한 스몰스는 동료들과 단합해 아마존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뚫어냈다. 그것도 아마존이 반노조 캠페인을 위해 지출한 430만달러(약 52억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12만달러(약 1억4000만원)로 말이다.

지난 4월 1일(현지시간) 뉴욕시의 아마존 물류창고 JFK8의 노조 설립 투표가 가결된 이후 뉴욕 브루클린의 미국 노동관계위원회(NLRB) 청사 앞에서 노동자들이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 EPA연합뉴스
이쯤에서 30년 가까이 흔들리지 않았던 아마존의 무노조 경영이 왜 지금 시점에 도전받게 됐는지를 짚어봐야 한다. 코로나19가 마침내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2022년 봄, 아마존 노동자들의 결사 노력은 ‘모멘텀’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오는 4월 25~29일에는 JFK8 창고로부터 멀지 않은 스태튼아일랜드의 또 다른 물류창고 LDJ5가 노조 결성에 관한 대면 투표를 진행한다. 앨라배마주 배서마의 아마존 창고는 지난해 우편 투표에서 노조 설립 반대 의견이 높게 나왔지만 이후 사측이 투표 절차에 압력을 행사한 의혹이 드러나면서 재투표 절차에 들어갔다.
앞서 2014년 델라웨어, 2015년 버지니아의 아마존 창고에서도 노조 결성 시도가 있었다. 투표 절차를 끝까지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미국은 노동관계위원회에 작업장 구성원의 30% 이상이 노조 설립 투표 실시에 동의했다는 투표 청원서를 제출해야만 투표함을 열 수 있다.
그동안 아마존은 창고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동종업계 종사자들보다 월등히 높은 시급과 의료보험 등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작업장 내 휴대전화 사용 금지, 휴게시간 제한 등 직원들에 대한 지나친 감시·통제 관행은 종종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배송업무가 폭증하면서 노동자 처우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밀폐된 창고에서 장시간 일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코로나19 감염사례가 폭증하는데도 사측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비자들이 배송지연 등으로 불만을 터뜨릴까 염려하며 직원들을 더욱 다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주들은 구인난에 직면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스스로 일자리를 떠나는 ‘대퇴사 시대’가 미국 등 선진국에서 열렸다. 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물류·배송업 종사자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필수인력으로 간주됐다. 기업들은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도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했다. 지난해 새로 출범한 조 바이든 정부가 노동정책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기업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아마존에 앞서 스타벅스에서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노조(뉴욕주 버펄로의 매장)가 만들어지는 등 미국 거대 기업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다. 그저 한철 바람으로 지나가고 말지, 아니면 미국 노동운동의 부활로 이어지게 될지 아직은 답을 내리기 어렵다. 분명한 건 우리가 당연하게만 여겼던 필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유진 국제부 기자 yj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