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꿈 없는 부자와 한국의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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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은 철학에는 “딱 보면 아는 능력”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통찰이라 부른다 했다. 그 통찰로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이 뭔지 맞힐 수 있을까.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표적 동물은 상어다. 그런데 1년에 상어로 인한 사망자는 10명이 안 된다. 포악한 사자는 100명인 반면, 온순해보이는 하마는 500명을 죽인다. 인류가 사랑하는 반려동물인 개로 인한 피해는 약 2만5000명에 이른다. 직관에 기반한 소위 인문학적 통찰과 과학적 근거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

말라리아 유전자 드라이브 개발은 빌 게이츠와 아내 멀린다 게이츠의 이름을 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주도했다. 빌 게이츠는 저개발국의 낙후된 의료 개선을 위해 지난 수십년간 기술 개발을 통한 자선사업을 해왔다. 사진은 지난해 이혼한 빌 게이츠와 멀린다 게이츠 부부가 2018년 9월 뉴욕에서 열린 한 행사에 함께 참석한 모습 / 뉴욕 AFP=연합뉴스

말라리아 유전자 드라이브 개발은 빌 게이츠와 아내 멀린다 게이츠의 이름을 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주도했다. 빌 게이츠는 저개발국의 낙후된 의료 개선을 위해 지난 수십년간 기술 개발을 통한 자선사업을 해왔다. 사진은 지난해 이혼한 빌 게이츠와 멀린다 게이츠 부부가 2018년 9월 뉴욕에서 열린 한 행사에 함께 참석한 모습 / 뉴욕 AFP=연합뉴스

말라리아 백신과 유전자 드라이브

단일 동물로 인간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건 모기다. 모기는 한해에 약 100만명 내외의 사람을 죽인다. 모기 다음으로 인간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동물은 인간이다. 한해에 약 50만명 내외의 사람이 인간에 의해 살해된다. 최진석 교수의 철학적 통찰은 이 문제에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혼란스럽지만, 아프리카는 매년 말라리아로 2억명이 넘는 인구가 감염되고 이중 약 60만~70만명이 사망한다. 말라리아는 오미크론 변이보다 전염력이 5~20배 이상 강하며 95% 이상의 사망자가 아프리카에 집중된 질병이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선진국에 말라리아 백신과 치료제 개발 연구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해왔지만, 자국에서 거의 발생하지 않는 질병에 선뜻 연구비를 내어줄 국가는 별로 없다. 코로나19 백신은 불과 9개월 만에 나왔지만, 말라리아 백신은 수십년이 지나 이제 겨우 임상이 진행 중이다.

말라리아 백신 외에도 몇 갈래의 대책이 함께 진행 중이다. 그중 하나가 유전자 드라이브 모기를 자연에 방사하는 전술이다. 유전자 편집 도구로 특수 유전자를 조작한 수컷 모기를 자연에 방사하면, 99%가 넘는 효율로 불임 모기가 나온다. 생태계 교란의 우려 때문에 지난 십수년간 찬반 논의가 이어져 왔지만, 매년 수십만명의 국민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아프리카의 국가 지도자들은 유전자 드라이브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위의 전략들이 총동원될 경우 2030년까지 말라리아 사망자의 75%를 줄일 수 있고, 이는 향후 30년 동안 2000만명의 아프리카 인구를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구 선진국들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빠른 백신 개발과 방역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줬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말라리아로 인한 죽음을 방관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통찰은 바로 이런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할 때 더 날카로울 수 있다.

말라리아 유전자 드라이브 개발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주도했다. 빌 게이츠는 저개발국의 낙후된 의료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수십년 동안 이들을 돕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돈을 기부하는 전통적인 자선행위가 아니라 기술 개발로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 과학기술을 통한 자선사업, 아마도 빌 게이츠가 재단을 통해 실행해온 사업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초 빌 게이츠가 설립한 민관 합작펀드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캐털리스트(BEC)’는 미국과 유럽연합, 영국의 청정기술 프로젝트에 약 18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의 탄소 배출 제로 달성을 돕는 게 이 펀드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BEC는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인 DAC(direct air capture), 그린수소, 지속가능한 항공유, 에너지 저장기술 등에 투자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 등도 참여 중이다.

빌 게이츠는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고, 이를 극복하려 소형모듈원자로(SMR)에도 투자 중이다. 그는 2010년 ‘테라파워’라는 원전기업을 설립했고, 현재 미국 와이오밍에 차세대 소형 원전을 건설 중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10년간 두산중공업 등이 SMR의 냉각로를 개발해왔다. 게이츠도 처음엔 한국의 기술에 관심을 보였으나,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만나 주춤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과학기술 투자로 미래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게이츠의 노력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제3섹터의 과학기술

넥슨의 대표였던 김정주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전에 그가 누적 약 500억원을 들여 국내 최초의 아동재활병원 건립을 추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게임산업과 재활병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재벌에 속하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재산을 환원했다는 건 본받을 일이다.

서구 선진국으로 이공계 분야 유학을 떠나본 과학기술인들은 다양한 분야의 민간공익재단에서 제공하는 장학금과 연구비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고 놀라게 된다. 대부분 사람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이런 민간재단들은 작게는 특정 과학기술 분야의 장학생을 지원하는 데서부터, 크게는 특정 과학기술 분야를 진흥하는 데까지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다. 록펠러재단,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 카블리재단, 슬로안재단, 사이먼스재단, 챈-저커버그 이니셔티브 등은 모두 재단에 기금을 투자한 부자들의 이름이다. 웬만한 주요 질병에는 부자들의 이름을 딴 재단이 있을 정도로 미국에서 민간공익재단은 과학기술을 이끄는 혁신의 한 축이다.

이제 한국의 부자들과 제3섹터를 한번 들여다보자. 한국의 민간공익재단은 1939년 김연수 삼양사 창업주가 설립한 ‘양영회’를 기점으로 시작됐다. 양영회는 이태규 등 과학기술인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했으며, 현재까지 자연과학 분야의 장학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양영회 이후 민간재단은 부자들이 탈세나 변칙상속을 위해 설립하는 관행으로 자리 잡았고, 대부분의 재단이 유명무실해졌다. 게다가 이명박의 청계재단, 박근혜의 미르재단 등으로 민간공익재단의 이미지는 추락할 대로 추락해 이제 정부도, 시민도 부자가 만든 재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삼성의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과 최근 서경배 아모레 회장이 창립한 서경배재단을 제외하면, 한국의 부자들이 철학을 가지고 미래 과학기술 분야에 공익적으로 투자하는 경우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한국 부자들은 문화재단에나 관심이 많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는 빌 게이츠나 화성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제프 베이조스, 일론 머스크가 나오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소위 문화강국이 됐다는 한국에서 어떻게 꿈꾸는 부자를 단 한명도 찾을 수 없는 걸까. 한심한 일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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