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최근 급부상한 메타버스의 잠재력에 대한 비전과 정보처리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인간을 선천적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유전공학이 한데 융합된다면 어찌 될까? 인공지능 개발을 터미네이터 탄생의 예고편쯤으로 보는 기우보다 훨씬 더 현실성 있는 악몽이 떠오른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아무리 빼어난 과학기술도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원자폭탄을 덥석 쥔 아이 꼴이고, 그로 인한 혜택을 온전히 나눌 수 없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처럼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잔혹한 착취를 합리화하는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과학기술은 보편적 복지와 동떨어져 기득권세력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선전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테드 창이 2019년 발표한 단편 ‘2059년에도 부유층 자녀들이 여전히 유리한 이유’는 바로 이에 대한 노골적 야유다. 소설 속 근미래 사회는 소위 ‘유전자 평등 프로젝트’라는 허울 아래 그간 부유층 자녀들이 비싼 대가를 지불해온 인지강화요법을 빈곤층 자녀들에게도 유전자 단계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문제는 그럼에도 아이들의 사회적 성공 비율에서 빈곤층이 여전히 형편없다는 데 있다. 외려 이런 결과는 유색인종과 특정계층의 DNA가 원래 열등하다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만 부추긴다.
한번 생각해보자. 학비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으면 가난한 집 아이가 부잣집 아이와 똑같은 선에서 출발할까? 수정란 단계에서 유전공학적 처치를 받는다 해도 맥락은 마찬가지다. 메타버스와 오프라인의 유료 고급정보에 바로 접근할 수 있고 언제든 과제에 필요한 현장방문이나 관련 전문가 미팅이 가능하며 개인교사의 고액과외비를 선뜻 지불하는 가정의 아이와 그런 것들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아이가 단지 동일사양 PC를 기본으로 제공받았다 해서 같은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PC와 장학금이 유전자 처치로 바뀐들 달라질 건 없다. 업그레이드된 지능에 걸맞은 다양한 자극을 받도록 지속적으로 후원받는 자녀와 새로운 CPU 속도에 부합하기는커녕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벅찬 부모와 사느라 애플리케이션과 데이터가 거의 비어 있는 ‘빈 깡통 PC’ 같은 자녀의 미래가 어찌 같겠는가. 변호사 시험자격을 로스쿨 졸업생들에게만 주는 걸 비판하는 여론이 지금도 가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작가는 혹여 앞으로 정부가 내세울지 모를 이른바 ‘유전자 업그레이드’ 또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면피성 복지정책에 불과할 뿐 근본해결책의 제시가 아니라고 본다. 장은선의 장편 <밀레니얼 칠드런>과 낸시 크레스의 단편 <스페인의 거지들>도 같은 이야기의 변주다. 전자는 DNA 단계에서 지능업그레이드를 받지 못한 아이가 아무리 밤잠 안 자고 코피 흘려 공부해도 ‘선택된 아이’를 절대 따라잡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일부 부모들이 유전자 조작으로 아예 24시간 자지 않는 아이를 만들어내 온종일 학업에만 매진하게 해서 사회적 성공을 예약하려는 이야기다(평생 휴식을 모른 채 살아가는 인간이라니 상상이나 되는가).
핵심은 이 모든 모순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도구가 바로 과학기술이라는 사실이다. 과학기술은 아무리 특출해봤자 그것만으로는 우리에게 기회의 공정과 사회적 성공의 형평성을 약속할 수 없다. 진짜 개혁이 필요한 건 과학이 아니라 사회제도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이다.
<고장원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