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경, 한국인 주연의 프랑스 영화
제목 배니싱: 미제사건
제작연도 2021
제작국 프랑스
상영시간 88분
감독 드니 데르쿠르
출연 유연석, 올가 쿠릴렌코, 예지원, 최무성, 이승준, 성지루, 박소이
개봉 2022년 3월 30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 조이앤시네마
배급 ㈜스튜디오산타클로스
공동배급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서울 세검정쯤 되는 계곡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먼발치 개울가에는 낡은 여행 가방이 있고, 지퍼 열린 가방에서는 썩어 문드러진 손이 나와 있다. 변사체다. 워낙 오래된 시신이다 보니 지문조차 나오지 않는다. 사건을 맡은 형사 진호(유연석 분)는 마침 한국에 세미나를 하러 들어와 있는 프랑스 출신의 국제 법의학 전문가 알리스(올가 쿠릴렌코 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리스는 ‘최신기법’을 사용해 지문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피살된 여인은 한국에 취업하러 들어온 중국인이다. 죽기 전 그에게 마취제가 투여됐지만, 치사량은 아니었다는 ‘미스터리’에서 같은 혈액형을 가진 또 한명의 납치 여성이 있었고, 그 여성이 불법 장기밀매 조직에 희생됐다는 것까지 알리스는 추론해낸다.
이 불법 장기밀매조직은 또 한명의 중국 여인을 납치한다. 납치 도중 마취가 풀려 여성은 뒤차 운전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체포하러 급습하는 경찰. 사건을 은폐하려는 조직은 저격용 총까지 동원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장기를 적출하는 의사는 최근 무리하게 성형외과 병원을 개업하는 바람에 돈이 쪼들려 밀매조직과 손잡고 불법 수술을 한다. 수술실은 지하 주차장에 설치돼 있다. 의사의 부인(예지원 분)은 통역일을 하는데, 아주 우연히도(!) 이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알리스의 불어 통역을 담당한다.
장기밀매조직에 맞선 국제공조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한국 부부의 어린 아들은 불치병을 앓고 있다. 수술을 위해서는 ‘B- 혈액형을 가진 아이의 심장’이 필요하다. 심장을 누군가에게 제공한 아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 장기를 얻기 위해 살인조차 서슴지 않는 폭력조직이지만 문제는 심장을 제공해줄 아이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의사의 불어통역사 아내가 해결책을 찾는다. 형사 진호는 알리스를 꼬마 사촌동생의 생일잔치에 초대한다. 이 사촌동생의 단짝 친구가 B- 혈액형을 가진 중국인이다. 동물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통역사 아내는 아이를 빼돌려 범죄조직에 넘긴다. 형사 진호와 알리스는 불법 장기밀매조직의 범죄행각을 멈출 수 있을까.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국인이다. 촬영 로케이션 장소도 모두 한국이다. 특이하게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스텝 상당수는 프랑스 사람들이다. 과연 이 영화는 이른바 K무비, 한국산 영화일까 아니면 프랑스 영화일까. 보통 영화의 ‘국적’을 따질 때 출연 배우나 장소가 아닌 제작사를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지난해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미나리>가 한국영화가 아니라 미국 독립영화이듯, 의심할 여지 없이 프랑스 영화다.
낯선 장르적 맥락과 문법
우선 칭찬. 언론 시사 이후 인터뷰에서 감독은 프랑스와 매우 다른 한국영화의 작업 스타일을 언급한 모양이다. 한국의 익숙한 장소와 풍경을 배경으로, 꽤 유명한 배우들이 주인공으로 참여했음에도 확실히 결과물은 낯설다. 일종의 소격효과라고나 할까. 예컨대 서울 명동이나 인천의 차이나타운,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포맷의 시퀀스와 전혀 다른 앵글과 포커스를 선보인다.
한국에서 기존에 만들어진 장르적 맥락과 다른 문법으로 만든 영화이기에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확실히 이 영화를 볼 관객들한테는 어필할 만한 매력 포인트다. 불법으로 이뤄지는 수술 현장이기 때문에 오래 마취할 수 없어 같은 혈액형을 가진 여자와 연결해 수혈한다는 ‘아이디어’도 신박했다(그런데 이건 감독의 연출력이라기보다 영화의 원작 소설상 설정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 피터 메이가 중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킬링 룸’이 원작이라고 한다).
각색의 문제일까. 개연성 없는 설정이 눈에 거슬린다. 아무리 강심장인 국제장기밀매조직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적 상황에서 공권력의 무력화까지는 엄두도 못 낸다. 게다가 저격용 총이라니! 사건 해결에 결정적 공헌을 하는 프랑스 여교수의 통역사가 ‘알고 보니’ 범죄조직의 하수인을 하는 의사의 남편이라던가, 범죄조직이 심장을 구하려던 아이가 하필이면 프랑스-한국인 부부의 아이라는 설정도 작위적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풍광은 좋은데 스릴이 없다. ‘스릴러 무비’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문제다.
‘한국의 프로파일링 기술이 저리 만만한 수준이 아닌데. 특히 지문과 관련해선.’ 영화 극 초반부에 떠오른 상념이 영화 마지막까지 가시지 않았다.
한국 과학수사 기법의 낙후성을 주장하는 건 영화적으로 보면 딱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까지다. 영화가 그리는 시대적 배경, 즉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정도까지다. 낙후한 분야는 DNA 대조 기술이지, 영화에서 주요한 기법으로 소개한 지문감식기술에 한정한다면, 한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프로파일링 선진국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대한민국은 전 국민 성인남녀의 지문을 데이터베이스화한 나라다. 기껏 범죄자들 정도만 모아놓은 미국이나 이웃나라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에서는 오래돼 문드러진 지문을 프랑스 교수가 약품을 사용해 추출하는 ‘신기술’을 두고 국제학술세미나를 연다. 이 분야에서도 한국이 가진 역량은 국제적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찾아보니 ‘고온습열처리법’이라고 한다. 한국 과학수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방법이다. 미라와 같은 말라붙은 시신의 지문도 뜨거운 물에 담가 순간적으로 팽창을 유도해 채취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기법으로 한국산이다. 게다가 DB화한 지문은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으로 진화했다.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의 특징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주민등록 지문DB에서 특징이 유사한 지문을 자동으로 여럿 찾아준다고 한다. 그렇다고 100% 일치하는 지문을 찾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 습도나 온도, 매질(매개물의 상태) 등 지문이 찍힌 현장과 상황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문 자동검색은 일치하는 패턴 위주로 결과물을 산출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후보군’을 놓고 경찰청 범죄분석센터에 근무하는 베테랑 감정관들이 패턴 일치도가 가장 높은 지문을 육안으로 골라내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