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건전성 리스크 같은 허구의 난관과 씨름할 여유가 없다. 우리 국가부채비율 수준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충분하게 안정적이다. 대응성 자산을 가진 금융성 채무의 비중이 높고, 순대외금융자산도 2021년 말 6379억달러로 전년보다 크게 늘었다. 국가부채의 증가속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가파르다는 주장이 있다. 코로나19 위기 기간에 우리의 국가부채 증가율이 주요 국가들보다 높기는 하나 이는 증가율을 계산하는 베이스가 되는 시기의 우리 국가부채비율이 비교대상 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낮기 때문에 나타난 착시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재정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이보다 인플레이션 위험에 잘 대처해야 한다. 미국의 올해 1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7.5%로 40년 만의 최고치였다. 2022년 전망치도 4.8%로 상향 조정했다. 유로존도 3.1%로 상향 조정했으며 한국에서도 물가상승 압력이 강해졌다. 올 1월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3.6% 상승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개전으로 이제 원자재와 에너지 가격이 더 뛸 것이다. 인플레이션에는 초기 대처가 중요하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미래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고 이는 경제주체들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준다. 임금상승 요구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많든 적든 그들이 가진 자산과 현금의 가치가 물가상승으로 인해 쪼그라드는 것을 피하려 전전긍긍하게 된다. 민간부문뿐 아니라 공공부문도 임금인상을 요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추가적 예산수요도 발생한다. 이러한 요구는 다시 더 강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
인플레이션이 위험하므로 재정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인플레이션 시기의 올바른 재정정책을 찾기 위해 우리는 두가지를 숙고해 봐야 한다. 우선 한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유발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다음으로 재정지출의 기능을, 즉 재정지출이 현재 한국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얼마나 긴요하며, 다른 정책수단을 통해 대체 가능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이 과다한 재정지출에 의한 것인가를 놓고 경제학자들 간에 의견이 갈렸다. 양적 완화와 재정지출이 과도해 수요를 자극했다는 주장과 수요 강세를 공급망의 문제로 파악하는 시각이 있다. 후자는 코로나19로 인한 대면활동의 공포가 노동공급 감소로 물류의 문제를 일으키는 동시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구재 수요를 자극하고, 거기에 반도체 공급 부족과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서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설명하는데 두가지 분석이 모두 의미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다른 상황인 건 분명하다. 코로나19 경제위기 국면에서 우리가 사용한 양적 완화와 재정지출의 수준은 미국이나 일본, EU 국가들의 수준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미국의 재정지출 확대가 GDP의 20% 수준이었다면 우리가 지난 수년간 집행한 코로나19 예산은 합산해 GDP의 5%에 미달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공한 지원금 때문에 수요가 폭증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건 적어도 한국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 경기가 충분하게 좋아지지 않았는데도 인플레이션이 생기는 건 대외적인 요인이며 글로벌한 공급망 차질에 따른 현상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에서의 가격상승이 소득효과를 일으켜 소비를 자극한 효과는 소폭 있었으리라 본다.
재정지출의 기능 측면에서 보면 현재 국면에서 재정지출과 정부의 역할을 줄이거나 가볍게 하면 치명적인 불리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끝이 보이긴 하지만 코로나19 위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로 사회적 긴장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민간의 투자를 견인할 정부투자도 과감하게 시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감염병과 기후위기, 양극화의 위기에 중첩적으로 노출된 한국경제가 위기를 돌파하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출을 단기에 그치지 말고 중기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재정지출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설혹 인플레이션 유발의 계기로 작용하더라도 재정지출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정이 국민경제를 위해 충분하게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인플레이션 요인을 제공하지 않는 방안은 찾아보면 충분히 있다. 재원조달을 국채발행을 통하지 않고 증세로 하면 된다. 조세를 통한 재원조달로 지출을 늘리는 건 통상 재정확대로 보지 않는다. 민간의 한 부문에서 조달한 재원으로 민간의 다른 부문에 지출의 효과를 전달하므로 재정을 통한 수요확대는 아니다. 재난극복이나 사회인프라 투자 등 국가의 재정을 꼭 필요한 분야에 지출하면서도 인플레 유발은 차단하므로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수년 동안 급격한 유동성 증가로 인해 자산가격과 자산소득이 크게 증가해 이 분야에서의 적정한 과세는 증가하는 재정지출을 일정 부분 감당할 수도 있다. 심각하게 벌어진 자산 및 소득격차의 해소를 위해 그게 오히려 더 바람직한 방향이다.
인플레이션은 통화정책을 통해 제어하는 것이다. 통화정책의 방향은 이미 전환됐고 이자율도 향후 일정 정도 더 오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산시장의 가격조정에도 바람직하다. 통화정책의 속성은 서민과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정책수단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낮은 이자율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 경기를 부양했으니 경기회복과 함께 이자율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그로 인해 어려워지는 서민과 소상공인은 재정으로 지원해야 한다. 한국의 인플레이션은 재정이 유발한 게 아니므로 재정지출을 줄여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통화정책의 방향전환으로 어려워지는 서민과 소상공인을 품어주려면 재정의 역할이 조금 더 커져야 한다.
재정지출을 줄이려는 목적에 치우친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한국은행을 압박해 경기부양을 통화정책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다. 새로운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려는 목적의식이 강한 한국은행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재부 관료들을 잘 통제해야 한다. 한은은 이자율의 증가로 정부의 국채이자 지불이 부담스러운 수준이 되지 않도록 정부 발행 국채를 일부 인수해 시중금리 인상에도 국채금리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니 앞으로도 성공적으로 관리해 가리라 본다.
<김유찬 전 조세재정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