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원 세컨드(One Second)
제작연도 2020
제작국 중국
상영시간 103분
장르 드라마
감독 장이머우
출연 장역, 류하오춘, 범위
개봉 2022년 1월 27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찬란
공동 제공 소지섭, 51k
‘또 한편의 인생작을 내놨군.’ 장이머우 감독(우리에겐 장예모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의 2020년작 <원 세컨드>를 본 소감이다. 대학교 2학년 때던가, 그저 ‘시네키드’ 시절 극장에서 봤던 <붉은 수수밭>이 떠올랐다. 초심으로 돌아간 듯싶다. 여주인공 류가녀(류하오춘 분)의 모습은 <붉은 수수밭>이 데뷔작이었던 공리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고.
문화대혁명 시기는 장이머우 감독에겐 영감의 원천인 듯싶다. 시안에서 태어난 장이머우의 집안은 국민당 간부 출신이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쫓겨날 때 장이머우의 아버지는 대만으로 건너가지 않고 남았다. 적대계급 출신이지만 딱히 차별받진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도 ‘문혁’의 광풍을 피해갈 순 없었다. 1968년 시골로 ‘하방’당해 고생 없는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것도 3년간이나. 다시 고향 시안 옆 도시로 돌아와 방적공장 노동자로 7년을 일하다 마오쩌둥이 죽고 다시 대학이 열리자 1978년 베이징전영학원에 진학했다.
주인공이 ‘영화’에 집착한 까닭
영화는 길도 없는 사막을 걷는 한 남자를 비추며 시작한다. 남자의 꼴이 영 아니다. 하루종일 걸어 어느 집단농장 강당 앞에 도착한다. 강당 안에서는 막 순회영화가 끝난 참이다. 남자의 목적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물어보니 다음 차례는 이웃 마을이다. 다시 이웃 마을로 떠나려는 찰나, 남자는 선머슴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영화의 릴이 든 깡통을 훔쳐가는 것을 목격한다. 남자와 여자아이의 추격전. 뺏고 뺏기고 하다가 다시 사막을 건너 이웃 마을에 당도한다. 여자아이는 왜 필름을 손에 넣으려고 저리도 필사적일까.
그나마 한국영상자료원의 설립으로 영화 보존복원에 혁혁하게 기여했지만, 한국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극장과 극장을 오가던 필름통은 입장 관객수가 줄어들면 그냥 폐기처분이다. 필름은 조각조각으로 잘려 밀짚모자 테 따위로 팔려나가곤 했다. 한국 영화사의 걸작으로 알려진 나운규의 <아리랑>(1926)도 그저 당시 관람한 사람의 증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자아이가 필름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남동생이 필름으로 만든 전등갓을 망치면서 전등갓의 주인인 불량청소년들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영화관람에 필사적인 사연은 뭘까. 그가 보려는 건 영화 본편이 아니다. 영화와 함께 틀어주던 뉴스 릴 22호가 목적이다. 아, 이 역시 요즘 관객들은 잘 모를 텐데, 이전에 한국도 영화상영 전 의무적으로 틀어야 했던 뉴스영화가 있었다. 대한뉴스라는 이름이다. 그런 영화라고 보면 되겠다. 남자는 누군가로부터 그 영화에 자신과 여덟 살 때 헤어진 딸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적힌 편지를 받는다. 문화혁명에 복무하기 위해 현장으로 하방한 딸이 19호 상점에서 물건을 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1초(秒)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원 세컨드’다.
그것뿐이었을까
남자는 조반파, 그러니까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를 내세우며 문화혁명에 앞장섰던 세력의 대장과 싸운 죄로 노동교화소에 갔는데 딸의 영상을 보기 위해 노동교화소를 탈출했다. 남자는 왜 딸이 나오는 그 1초(커트로 따지면 보통 24프레임이니 딸이 등장하는 필름은 딱 24장인 셈이다)에 집착했을까.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제목으로 사용한 ‘원 세컨드’의 의미는 딸의 모습을 담은 1초의 필름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한 기억, 순간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1초밖에 안 되겠지만 그에게는 소중한 만큼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뿐이었을까. 영화는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황금곰상 부문의 초청을 받아 상영 예정이었는데 돌연 ‘기술적 문제’를 이유로 출품을 취소했다. 영화는 지난해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했는데 리뷰를 보다 보면 주인공의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선전영화 속 ‘열네 살 소녀’는 필름 속 자태만 남기고 이 세상에는 없는 존재다. 우리가 본 작품에서는 “딸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노동교화소에서 풀려난 그가 왜 자신의 가족 대신 류가녀를 찾으러 갔는지 똑 떨어지게 설명한다. “문혁에 참여한 어린 소녀가 죽었다”는 영화의 설정이 중국 영화 검열당국이 지적한 “기술적 문제” 아니었을까. 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전에도 한차례 언급한 적 있지만, 중국에는 다른 나라엔 없는 영화 장르가 있다. 당의 시책에 따라 만든 선전영화, 이른바 주선율(主旋律) 영화다. 대장정에 나선 모택동 이야기라든가, 인민해방군의 헌신적인 투쟁 등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는 영화 속 영화로 실제 1964년 제작한 영화가 나온다. <영웅아녀>(사진)다. 그냥 허구로 설정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진짜다. 유튜브에 1시간 47분 전편이 올라와 있다. 워낙 인기가 많아 2편도 제작한 모양이다.
장이머우의 영화에서는 영화에 몰입해 있는 관객들의 묘사와 함께 하이라이트 장면만 나왔지만, 실제 <영웅아녀>의 배경은 한국전쟁이다. 유튜브에서 주마간산 격으로 돌려봤다. 항미원조에 나선 인민해방군이 진입하니 조선 사람들이 상모를 돌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에 다른 코너에서 쓴 <나의 전쟁>(2016) 영화처럼, 아무래도 한국전을 겪은 우리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장이머우 감독은 주선율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을 보면 묘한 애증이 느껴진다.
그는 흔히 세계 3대 영화제라고 부르는 베를린·베니스·칸 영화제를 모두 석권한 세계적인 거장이다. 명성에 금이 간 것은 그가 연출한 <영웅: 천하의 시작>(2002) 때부터였다. 진시황 암살을 모티브로 만들었지만, 진시황에 투영한 중국공산당의 ‘대국주의’를 그가 수용한 것 아니냐는 논란을 낳았다. 사극영화 <황후화>(2006)도 비슷한 비판을 받았고, 맷 데이먼과 유덕화 등을 내세운 SF판타지 <그레이트 월(長城)>(2016)에 이르러서는 비판을 넘어 “연출능력마저 처참하게 망가졌다”는 평가까지 들었다. 그래서일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듯한 <원 세컨드>는 그래도 역시 거장은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갖게 한다. 그의 최신작은 지난해 9월 개봉한 <공작조: 현애지상>이다. 193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물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