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도시에 ‘한국의 멋’ 입힌 거리예술가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930년대 후반 ‘킬로이 다녀감(Kilroy was here)’으로 상징되기 시작한 거리의 낙서는 그라피티로, 벽화로, 또 거리를 무대로 하는 설치미술로 그 위상이 변화됐다. 비주류이자 하위문화로 취급받던 그라피티는 오늘날 거리가 아닌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도 종종 마주친다. 반항적이고 직접적인 자기표현이 가능한, 패스트푸드 같았던 그라피티는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현대미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다. 여기에다 각자의 개성과 표현이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즘의 시대정신까지 만나면서 날개를 달았다.

로얄독이 미국 LA의 한 한식당 건물에 그린 한복 입은 미셸 오바마 그라피티 / 로얄독 인스타그램

로얄독이 미국 LA의 한 한식당 건물에 그린 한복 입은 미셸 오바마 그라피티 / 로얄독 인스타그램

다음에 소개하는 빛나는 재능과 개성 강한 한국의 거리예술가들은 그들의 정체성과 개성 있는 양식을 구축했고, 거리예술이 국내에서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상당히 기여한 예술가들이다. 이들이 시작한 예술가로서의 여정은 거리에서 시작됐지만, 미술관으로 갤러리로 작품의 무대가 옮겨가기도 하고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며 젊은 언더그라운드 예술은 빛을 발하고 있다. 지구가 작가의 주요무대라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약력에 밝힌 정크하우스의 희망 섞인 당찬 목표에서 이들이 창조해내는 거리예술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로얄독, 한복을 입은 글로벌 도시 로얄독(Royyal Dog)은 미국 LA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라피티 예술가다. 미국 LA와 브롱크스 등지에서 그린 작품이 먼저 알려진 뒤 한국에도 존재가 알려지게 된 아티스트다. 그는 한복을 입은 미셸 오바마나 흑인 꼬마 소녀의 모습을 통해 다문화주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한복 시리즈는 인물 뒤에 덕담이나 달이나 꽃 등을 그려넣으며 대중과의 소통력을 높였다. 로얄독이 그린 한복을 입은 다양한 인종의 여인은 글로벌 도시의 어느 벽면에서 빛나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국은 거리예술가들이 활동하기에 그리 우호적인 곳은 아니다. 때문에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알리며 거리예술가로서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입지를 다지기로 한 것은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지금도 미국 LA에 거주하며 글로벌 도시와 브랜드와 협업도 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알원의 <Seoulscape-마포구 와우산로 116> / 출처 www.grone.kr

지알원의 / 출처 www.grone.kr

‘힙’해 보이고 멋진 삶으로 여겨져 시작한 그라피티였을지 모르지만 30대 중반인 지금,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대중과 소통하는 그의 포토리얼리즘 스프레이회화는 K컬처의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조대, 거리에 그려지는 액막이 부적 미국에서 시작된 그라피티를 한국화로 재해석한 듯한 조대의 작품은 동양적이며 샤머니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의 돌기와 자유로운 곡선이 만들어낸 형태가 하나의 부적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작가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본인의 작품은 액막이 부적과 같은 것이라 했다. 캘리그라피적 특성과 오토마티즘적인 표현기법은 서양에서 시작된 그라피티에 한국적 미와 정서를 담아내기에 안성맞춤인 표현법이다.

2020년 여름, 서울 홍대 서드뮤지엄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조대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기 위한 고민의 과정을 보여줬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그라피티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이제는 펜디, 아디다스, 무신사-LMC, 마운틴 듀 등 다수의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며 이름을 알리고 있다.

정크하우스의 <룰루레몬> / 출처 www.junkhouse.kr

정크하우스의 <룰루레몬> / 출처 www.junkhouse.kr

최근 조대가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환경문제다. 이전의 크고 작은 환경 관련 이슈에서 시작해 코로나19까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이기심에 경각심을 주는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흙으로 돌아가다’ 시리즈에는 환경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담겨 있다.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의 주범인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는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흙으로 돌아가다’는 자연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지알원, 한국적 그라피티를 그리다 지알원(GR1)의 작품은 거리뿐만 아니라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장에서도 만날 수 있다. 길거리에서 화이트 큐브로, 거리의 벽이 캔버스 액자로 무대가 옮겨졌다. 길거리 벽화에서 오브제와 주제 자체를 부각시켰다면, 캔버스에서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라피티가 그려진 도시공간 자체를 옮겨놓았다. 밀페이스트 업 기법을 사용하지만, 거리가 아닌 작업실의 캔버스로 이동한 지알원(그라피티 넘버원이라는 뜻의 닉네임)의 서울 스케이프 연작을 보면 그라피티가 그려진 도시의 골목과 공간이 작품의 화두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한국화가 그려지듯 지알원이 검은색과 회색의 모노 톤의 중첩된 선으로 옮겨놓은 화폭에는 흑백사진 효과의 필터를 사용해 찍은 듯한 낙서 가득한 도시의 골목풍경이 펼쳐진다.

그의 눈에 포착돼 옮겨진 도시를 보면 그라피티의 출생이야 미국일지라도 지알원의 작품에는 화면 가득 묵직한 묵향으로 풍기며 한국의 화이트 큐브 중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조대의 <흙으로 돌아가다> / 출처 jodae4.wixsite.com

조대의 <흙으로 돌아가다> / 출처 jodae4.wixsite.com

정크하우스, 꿈꾸는 도시 정크하우스(Junk House)는 한국에 거리예술이 처음 들어온 때부터 활동해온 선두주자다. 거리의 벽과 길거리에 유쾌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캐릭터와 작품 스타일을 구축해 도시의 숨은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와 공상과학 소설을 좋아했던 정크하우스는 SF적 상상에 만화가 데이브 쿠퍼의 영감을 더했다. 그는 일러스트와 멀티미디어 디자인을 공부한 뒤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때 좀더 창의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고, 이 욕망이 그를 거리예술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한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캐릭터는 유연하고 풍부하지만 정크하우스만의 색채로 거리 곳곳을 밝히며 행인을 반겨준다. 작가는 본인이 생활하고 있는 도시공간과 그곳에 있는 사물이 살아 숨 쉬며 그 공간만의 생명이 있다는 상상하며 작업을 한다. 그 상상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캐릭터와 형태, 에너지 충만한 색채는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무심한 관객을 잡아끌기 충분하다. 거리예술을 하면서 공공의 열린 장소에서 작업 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졌다는 그는 도시 전역을 무대로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과 설치까지 다양한 작품을 창작해왔다.

여기 필자가 미쳐 다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한국 거리예술가 중에도 제2의 로얄독, 지알원, 정크하우스, 조대가 있고 언젠가 미술사에 한줄로 남겨질 그들의 작품이 있을 것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 거리와 미술관이라는 영역을 넘어 시각예술의 한 영역이 된 지 오래인 거리예술의 미래는 밝다.

※거리예술의 세계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허지영 MK 아트디렉터, 장인선 MK 스토리텔러>

이미지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