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도 돼봤고 사십도 돼봤다. 한 살 더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 해야 할 일들로 바빴다. 이제 더 이상 이십대가 아니지. 사십대라 그런지 예전 같지 않네. 그 정도로 넘어갔다. 오십은 상상해보지 않은 나이였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먹었나. 나는 그냥 계속 이렇게 살 건가. 막막했다.

다행히도 내가 발견한 건 삶이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보다 앞서 삶에 진지하게 대면했던 훌륭한 이들이 있었다. / 경향자료
여전히 본업에서 성장하는 오십대도 있을 거고, 충실하게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오십대도 있을 거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오십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십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더욱 막막했다. 본업으로 삼고 싶던 건 오래전 놓쳤다. 긴 시간을 주부로 살았다. 아이는 어른이 됐고 살림은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여유가 꼭 좋은 건 아니었다. 빈 둥지가 폐허가 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아쉽게 지나가버린 오십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이 이렇게 진심인 적이 있었나. 오십이 되기 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내가 정말 선택한 적이 있었나. 나라에서 정해준 나이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 공부를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결혼을 한 다음 아이를 낳아 키웠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내가 결정했다기보다 주어진 선택지에서 답을 찾았다. 그러니 온전한 내 선택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건 그 수많은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나라는 점이다. 후회가 한둘이 아니다. 100세 인생에 이제 겨우 절반일 뿐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지나가버린 오십년이 아쉽다. 아쉬움을 발견하게 한 것은 죽음이었다. 오십이 되기 전까지 삶의 끝을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절반이나 살아버린 지금, 그 끝에 놓인 죽음을 가끔 흘끔거리지 않을 수 없다.
아쉬움과 만족감의 차이는 크다. 컵에 반쯤 남은 물을 어떤 사람은 반밖에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반이나 있다고 한다. 물의 양은 같다. 오십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는 건 그 물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지나친 아쉬움으로 내면을 할퀴지 않는 일이고, 어설픈 만족감으로 변화와 성장을 거부하지 않는 일이다. 다행히도 내가 발견한 건 삶이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보다 앞서 삶에 진지하게 대면했던 훌륭한 이들이 있었다. 닫힌 문 앞에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은 파커 파머의 고백, 시련을 수용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삶, 사랑과 일과 표현을 모두 강조한 에리히 프롬의 권유, 삶에의 열정과 폭넓은 관심을 가지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해법,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라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
여기 ‘오십, 길을 묻다’ 연재에서 다뤘던 저자들과 내용들이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자아라고 불러도 좋고 소갈딱지라고 불러도 좋은 내면에 갇혀 쓸쓸한 노년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익숙한 것이 편하고 새로운 것은 어렵다. 편안한 사람들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가던 곳을 가고 하던 것을 하고 먹던 것을 먹고 싶어진다. 그러면 시간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정말 빨리 지나간다.
오십에 도달해보니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도 벅차다. 대학을 다닐 때 보고서를 쓰려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거나 자료를 조사해 복사해야 했다. 그걸 공부해 리포트 용지에다 손글씨로 써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이제는 온라인에서 책과 콘텐츠를 사고, 온라인으로 편지나 글을 쓴다. 지난 삼십여년 동안 세상은 무척 빠르게 변했다. 앞으로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나이가 들수록 유연함은 점점 떨어질 거다.
책을 통해 발견한 미래
책은 그런 나의 굳은 시선에 한 줄기 빛을 비췄다. 워낙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이 마음에 들면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한 책의 실마리를 물고 다른 책으로 꼬리를 이어가며 읽었다. 이번에 이 연재를 하게 된 덕분에 분명한 목적을 갖고 책을 읽었다. 먼저 책들이 많이 달라보였다. 어떤 책은 예전에 분명 인상 깊게 읽었는데 왜 그랬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책은 자기개발서 같아 멀리했는데 제대로 붙잡아 읽고는 오십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얻었다.
이 연재를 통해 내가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십 이후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살지다. 이제 남은 인생에서 일의 의미는 이전과 똑같지 않을 거다. 일이 자아실현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어려서부터 배웠다.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 정말이라 해서 모든 일이 자아실현에 기여하는 건 아닐 거다. 대개의 일은 생계를 위해 돈을 벌든가 억지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지루한 노동이었다. 지루한 노동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게 어디까지 가능할까. 오십대의 나는 일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 싶기보다는 이제라도 내게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다.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둘째,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것은 여태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던 여가다. 내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한가한 시간은 점점 길어질 거다. 이 여가를 잘 보내고 싶다. 이럴 때 참고로 할 만한 것은 남들은 뭘 하며 노는지를 엿보는 거다. 취미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무엇엔가 몰두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이제부터라도 사는 재미를 찾고 싶다. 나만의 취향을 가꿔보고 잃어버린 취미를 들춰보노라면 내가 무엇을 할 때 즐거운 사람인지를 알아갈 수 있을 거다. 자아실현은 본래 이쪽과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여가를 잘 보내는 건 나와 더 친해지거나 나에게 더 친절해지는 거라고 믿고 싶다.
셋째, 어떻게 살 것인지 못지않게 어떻게 늙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도 중요하다. 죽음 앞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조금씩 더 분명해진다. 오십이니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점점 줄어든다. 흘러가는 대로 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어떻게 살고 싶으냐면, 잘 살고 싶은 거다. 어떻게 죽고 싶으냐면, 잘 살다가 잘 늙어 잘 죽고 싶은 거다. ‘잘’은 밑도 끝도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 ‘잘’의 해법과 내용을 찾아야 하는, 찾고만 싶은 게 오십에 도달한 나의 깨달음이다. 앞으로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용기를 안겨주고 싶다.
*지금까지 이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분들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