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거리예술은 해외에서 상업적 성향이 강해진 그라피티와 1990년대 중후반 힙합 문화와 결합하며 시작됐다. 동시에 외환위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면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부딪힌 젊은이들이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는 기성세대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도구 역할도 탄생의 배경을 같이하고 있다. 그라피티 본연의 저항적인 메시지는 익명성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나 집단적으로 표출됐고, 신자유주의적 삶을 살아가던 젊은이들에게 딱 맞아 떨어지는 도구였다.
이후 한국의 그라피티는 두 방향으로 전개됐다. 해외에서 상업적으로 진화를 시작한 그라피티는 한국 1세대 아티스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상업적으로 자리 잡았다. 또 다른 방향은 한국 특유의 민중미술 바탕 위에서 특히 벽화의 형태로 발달했다. 이들 1세대 그라피티 예술은 지역 재생사업에 목적을 둔 공공기관의 벽화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한국에서 거부감 없이 하나의 예술 장르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그라피티, 도시재생과 함께하다
한국 그라피티의 시작은 해외와 다르다. 오래전부터 한국의 벽은 대중 혹은 민중을 위한 소통의 장소를 대변했기에 벽화는 불법적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가장 활발한 소통이 대자보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라피티는 자신들의 작품이 그려진 벽이 하나의 소통 공간이자 공적인 장소라고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공공재로서의 역할이 부각되던 건물 벽은 분명 소유주가 있음에도 누구나의 것, 혹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랜 세월 동안 민중예술 속에서 혹은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한국의 벽은 시민에게 소통의 장소였고, 혁명의 메신저이기도 했다.
이렇게 형성된 한국의 벽은 ‘공동소유’라는 무언의 인식이 생겼다. 그 벽에 그려진 불법적인 그라피티도 소통을 위한 하나의 대안적 도구로 대중에게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지방자치단체는 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재건축·재개발이라는 복잡하고 무거운 과정 대신 거리예술가들을 지역 재생 프로젝트에 기용했다.
한국 최초의 벽화마을은 통영의 동피랑이다. 이곳은 한적하고 잊혀가던 바닷가 마을이었지만 형형색색의 벽화가 그려지며 남해지역의 대표적 관광지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전국 곳곳에 공공기관의 벽화조성사업이 이뤄졌는데, 부산의 감천벽화마을, 전주의 자만마을이 대표적이다.
벽의 자유로운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그라피티가 합법의 테두리 안에 서게 된 것은 바람직한 상황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의 벽화사업은 공익적인 목적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효과가 없거나 공공기관의 관심이 저하되면 그 마을의 벽화는 지역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해 사라지기도 한다(부산의 문현동 벽화마을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한국의 그라피티 1세대로 꼽히는 제바, 코마, 로얄독, 닌볼트 같은 예술가들은 한국의 허용적인 작업 분위기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형성된 독특한 거리문화의 상업적인 가능성을 감지한 기업, 글로벌 단체들과의 활발한 협업을 통해 글로벌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급속한 자본과의 결합이 반발을 낳기도 했지만 제도권 예술의 형식적인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기성세대 문화에 대한 저항정신과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라피티 1세대와 진화하는 예술가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대기업과의 협력 작업이 많아지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수록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한 고민 또한 커진다.
미국이나 유럽의 그라피티 예술은 상업광고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난민, 반전, 반핵, 환경오염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자신들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도시 전체를 예술 활동무대로 확장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여전히 익명성을 지키며 자신의 메시지를 스텐실로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 있는 뱅크시의 작품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작가의 의도 자체가 상업적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이 지배하는 미술시장에 저항적인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재치 있게 벽화에 표현한다.
서울의 압구정 나들목, 신촌, 홍대의 토끼굴은 여전히 그라피티로 뒤덮여 있고, 신진 그라피티스트의 등용무대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 거리예술 1세대의 상업적인 성공은 길모퉁이 어딘가를 새롭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갑자기 마주친 벽화는 분명 일상에 대한 환기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낯섦’ 그 이상의 감동을 주지 못할 때도 있다. 지나친 상업성을 가지게 된 예술들이 가지는 고민은 그라피티, 한국의 거리예술가들에게 또한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남게 됐다. 과연 그들은 자본에 함몰될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우연히 제주도에서 찾게 됐다.
지난 7월,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을 메고 제주도의 땡볕 아래를 걷다 어느 레몬 창고에서 마주친 벽화는 어떤 기대도 없었던 터라 순순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창고 문에 그려진 레몬과 농부의 옆얼굴은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솔직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기분 좋게 시선을 잡는 힘이 있었다.
20세의 고한결. 무명의 젊은이가 그려놓은 농장 창고의 그림은 그라피티가 가진 힘을 새로이 되새겨 보게 했다. 젊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잃어버린 정신이 무엇인지 일깨울 수 있는 힘을 가진 대중의 예술이 바로 거리예술이다. 압구정 나들목에서, 한국 최남단 제주도의 땡볕 아래서 우리는 20세의 젊은 거리예술가 대한민국 어느 고한결이 주는 꺾이지 않는 힘을 마주하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무명의 예술가들인 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허지영 MK 아트디렉터, 장인선 MK 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