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안 듣는 아이는 ‘모르모’가 데려갈 거야
제목 숨바꼭질: 같이 놀아줘(Play with Me)
제작연도 2021
제작국 멕시코
상영시간 83분
장르 공포
감독 아드리안 가르시아 보글리아노
출연 리스 디에파, 발레리 사이스, 에밀리오 벨트란, 파블로 기사 코에스팅게르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요지경 인생>이라는 지상파 심야프로그램이 있었다. 연배가 있는 분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1980년대 초반이다. 한국 방송프로그램이 아니고, 버라이어티쇼 형식으로 진행된 미국 방송프로그램이다. 한 번에 서너 꼭지를 방영했다. 꼭지가 마무리될 때마다 방청석의 관중이 “놀라워요!(That’s Incredible!)”라고 합창을 했다. 당연히 그게 이 TV 방영 쇼의 원제다. 한국에선 밤 11시에서 11시 30분쯤에 방영하는 프로그램이라 꽤 수위 높은 이야기도 많았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는 자꾸 눈이 감기는 수마(睡魔)와도 싸워야 했다.
벌써 거의 40년이 됐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의 이야기다. 폐장 시간이 지나면 이곳의 장난감들은 ‘깨어난다’. 곰 인형이 눈을 뜨고, 삐뽀삐뽀 소방차도 스스로 경광등을 굴리며 여기서 저기로 움직인다. 그저 재연 장면일 뿐인데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 있는 걸 보면 꽤 겁먹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저 장난감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건 성불하지 못한 아이들 귀신이 밤이면 밤마다 장난감 코너에 모여드는 것? 실제 프로그램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보모로 취직한 소녀가 간직한 트라우마
소피아는 자신의 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멕시코 부호 집에 보모로 취직한다. 소피아가 주로 돌봐야 하는 것은 갓난쟁이 브루노이지만 그에게는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맏형 가브리엘과 누나 세시가 있다. 부모의 마음이 이제 막 태어난 막내에게 기운지라 아이들의 질투가 장난이 아니었는 모양이다. 새로 오는 보모마다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떠났고, 그러다 보니 소피아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다. 세 아이의 부모가 외출하고, 의지했던 언니마저 데이트하러 나가던 날, 소피아에겐 세 아이를 맡아 돌봐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이제 막 열아홉 살이 됐지만 소피아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 외형상은 할머니가 자신을 돌봤던 조손가정이었지만, 치매가 온 듯한 할머니는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할머니는 어린 소피아에게 모르모라는 존재를 이야기하는데,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모르모가 납치해 평생 자신과 놀게 한다는 것이다. 원래는 아이들을 어르기 위해 하는 이야기겠지만, 할머니 버전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뒤틀려 있다. 소피아가 모르모와 안 놀아주니 그 존재가 자신을 데려가려 한다는 원망이다.
공포영화 장르에서 이런 트라우마는 어떤 트리거를 계기로 되살아난다. 영화에서 트리거는 바퀴 달린 병정 인형이다. 소피아는 세시의 방 장롱 안에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는 자꾸 눈이 감기는 수마그 인형을 발견한다. 당연히 세시는 그 인형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고, 기분이 나빠진 소피아는 인형을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뭐, 머지않아 그 인형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리고 쓰윽 아이들 곁을 맴도는 알 수 없는 존재.
복잡한 이야기 구조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모르모와 소피아의 게임 도중 뭔가 상태가 좋지 않은 아이들이 10여명 계단에서 출몰하는데 대략 예상하자면 그렇게 모르모와 게임에 져 평생 놀이친구가 돼버린 아이들이다. 우리의 주인공 소피아의 운명은? 당연히 기지를 발휘해 모르모와 게임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똑바로 봐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마침내 자신을 억누르던 할머니 죽음과 관련된 죄책감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변덕 끓던 아이들의 심술도 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가라앉게 될 것이고.
장르적 규칙을 반복하는 진부함
아쉽게도 영화는 예측의 범위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장르적 클리셰와 도식에 따라 조립된 공산품을 보는 느낌이랄까.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무서운 장면이 아니지만 40여년 전 <요지경 인생>에서 다룬 한밤중에 스스로 움직이는 장난감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기자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이 멕시코산 공포영화로 장르에 입문한다면 인생 공포영화로 기억하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의 크레디트를 보니 등급이 15세 관람가다. 이럴 수가. 전체관람가를 예상했는데. 생각해보니 40여년 전 <요지경 인생>도 그랬다.
영화 속 괴물 모르모라는 존재는 실제로 있는 것일까. 궁금해 검색해봤다. 있다. 단 영화는 스페인어를 쓰는 멕시코 공포영화인데, 모르모라는 설화의 기원은 그리스 민담이다. 엄마나 유모가 밤에 잠 안 자고 칭얼거리는 아이들이나 나쁜 짓을 하는 아이들을 ‘위협’하기 위해 동원하는 상상 속 존재인데, 영화에서는 아이 또는 두건을 둘러쓴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만 원래는 여성유령이라고 한다. 이야기의 기원은 아테네 남서쪽에서 있는 코린트라는 도시에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인데, 아리스토텔레스(우리가 아는 그 아리스토텔레스가 맞다)에 따르면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고 도시 밖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중세시대 이후 모르모 설화의 뒤를 잇는 것이 영국의 홉고블린(hobgoblin)이나 부기맨일 테고.
한국적 버전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당장 떠오르는 것은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다. 배고픈 호랑이가 ‘곶감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섭길래 내 이야기를 할 때는 계속 울던 아이가 얌전해진 거지?’라는 의문을 떠올렸다는 그 설화. 예전에 취재할 때 민속학자로부터 한국에서 요괴·귀신설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 실존하는 위협인 호환(虎患)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은 적 있다. 위 모르모의 경우도 변형된 파생어인 모르몰리스(mormolyce)는 ‘무서운 늑대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귀신이나 늑대나. 지금이야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멸종위기종이 됐지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늑대는 고립된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을 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설화나 이야기엔 비슷한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