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거주 미얀마 청년 리더와 활동가에게 듣는다
미얀마가 다시 군홧발 아래 놓인 지 열달이 지났다. 정보가 실시간으로 확산되는 시대, 연대는 네트워크를 타고 국경을 뛰어넘는다. 해외에 거주 중인 미얀마인들이 고국의 가족, 친구들과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 세계 미얀마인들은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알리기 위해 각자 선 곳에서 투쟁 중이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청년과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나만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죄책감, 민주화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한편으론 군부독재와 민주화라는 역사를 유사하게 겪은 한국인들과 연대하며 미얀마의 봄을 꿈꾸기도 한다. 군부쿠데타 사태가 장기화하며 점점 무뎌지다가 국제사회에서 잊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또한 상존한다. 1962년 군부 통치가 시작된 이후 최근에야 민주화가 진행됐으나, 또다시 과거로 회귀할 위기에 놓인 미얀마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억과 연대다.
미얀마의 봄은 언제 오나
“어젯밤만 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게릴라전을 하는 젊은 친구 50명이 동시에 체포됐거든요. 그 전에는 민족민주연맹(NLD) 의원이 잡혔고요. 거의 1년이 다 돼가고 있는데, 더 장기화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보다 더 많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느낌.” 행동하는미얀마청년연대 리더 웨노에흐닌쏘씨(35)는 미얀마의 현 상황을 이같이 말했다. 그와 만난 지난 11월 21일은 서울 중구 충무로 갤러리 꽃피다에서 해외주민운동연대(KOCO)가 주최하는 ‘피어나라 미얀마’ 전시가 개막한 날이었다. 한칸짜리 갤러리에는 미얀마 현지에서 보내온 사진이 쭉 걸려 있었다. 산속으로 대피한 청년, 불붙은 도로에서 군인과 대치한 시위대, 천막 밑에 피신한 노인…. 사진 속 미얀마의 모습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시위대가 든 손팻말에는 “체포된 이들을 석방하라”, “민주주의를 쟁취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쪽에 마련된 분향소 옆에는 군부에 의해 살해당한 이가 입었던 피 묻은 옷과 방독면이 걸렸다.
“사실 아들만 아니었더라면 (미얀마에) 들어가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앞으로 미얀마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가 무섭습니다. 코로나19에 쿠데타까지 겹치는 이중고에 시민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이기고는 싶지만 우리 힘이 달리는 건 사실이고….” 웨노에흐닌쏘씨는 쿠데타 발발 직후 한국에 있는 미얀마 청년들을 모아 집회, 강연, 모금운동, 계기교육을 비롯해 미얀마 소식을 알리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미얀마에 있는 그의 언니와 형부가 군부를 거부하며 교단을 떠났듯 그가 한국에서 미얀마에 힘을 보탤 수 있는 ‘풀뿌리 활동’이다. 군부 통치에 항거한 2007년 샤프란 혁명 때처럼 직접 거리로 뛰쳐나갈 수는 없지만, 미얀마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은 뒤처지지 않는다. 그는 “나는 아직도 색칠할 줄을 모른다. 그만큼 어릴 때 (군부 통치에서) 짜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한이 많다. 내 후손에게까지는 이런 안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얀마에서는 지난 2월 1일 민아웅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이후 이에 항거하는 시민불복종운동(CDM)이 이어졌다. 군부가 강경대응하며 민간인, 시민방위군(PDF)이 체포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군부는 공습까지 감행했고,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75)이 이끄는 NLD, 민주세력 관련자의 연행 소식도 잇따랐다. 일례로 지난 11월 9일 미얀마 법원은 아웅산 수치 측 인사에게 부패혐의로 각각 90년과 75년을 선고했다. 집계에 따라 다르지만 시위참여자와 민간인 수천명이 죽고 구금됐다.
군부가 내세운 명분은 지난해 실시된 총선에서 부정이 있었으니 의혹을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군부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한 눈가림이라는 해석이 많다. 미얀마에서 군부는 ‘헌법적으로’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 대표적으로 상원과 하원 각각 군부 추천 몫이 25%를 차지한다. 개헌을 하려면 75%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부권을 가진 셈이다. 이 때문에 반군부 민주세력인 NLD는 2015년 정권을 잡은 이후 이 비율을 점진적으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개헌이 실제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2020년 총선에서도 NLD가 연승을 거두자 군부의 심기는 불편해졌다. 이처럼 미얀마 헌법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군부의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민주화의 복병으로 작용해왔으며, 올해 쿠데타도 그 연장선이다. 아웅산 수치를 위시한 민주세력이 군부를 통제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쿠데타 이후 민주세력이 꾸린 임시정부격인 국민통합정부(NUG)는 개헌을, 군부는 재선거를 주장하며 대립하는 상황이다.
포기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맛
“네윈 군사정권에 반대했던 1988년(8888항쟁)만 하더라도 미얀마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무슨 맛인지 몰랐습니다. 예를 들면, 망고는 노란색이라고만 알고 무슨 ‘맛’인지는 몰랐던 겁니다. 그러다가 2015년 아웅산 수치 정부가 들어오면서 자유를 경험하게 해주고 개방을 시작했죠. 그러면서 망고를 먹어보고 ‘달콤하다’고 하는 것 같이, 미얀마 국민이 민주주의의 맛을 알게 됩니다.” 조우모아 한국미얀마연대 대표(47)는 이번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게 지속되는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이미 맛본, 달콤한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미얀마 시민과 이를 빼앗아가려는 군부세력의 대립이라는 뜻이다.
그는 미얀마에 있을 때 8888항쟁에서 친구들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봤고 그 자신이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실감한 건 한국에 온 이후라고 했다. 조우모아 대표는 “한국이 부마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를 이룬 걸 알게 됐고, 국민이 힘이 있어야만 정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미얀마 국민의 마음속에 아직 공포가 많이 있고 군부를 물리치기 쉽지 않지만 이번에 실패하면 더 이상은 군부독재와 싸울 수 없을 것 같다. 이번에 꼭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 경남 창원역에서 미얀마 동포, 한국 연대자들과 집회를 한다. 벌써 39차를 앞뒀다. 그는 “우리가 해외에 있더라도 미얀마 국민을 잊지 않았다, 함께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국제사회에서 볼 때는 답답할 수 있지만 미얀마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할 일을 할게. 언니는 언니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해이만흐닌씨(31)에게는 동생의 말이 원동력이 됐다. 그는 이번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주축인 소위 ‘MZ세대’다. 소우모아 대표와 달리 청소년기·청년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주주의를 겪었다. 그는 이전까진 정치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많지 않다. 대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다 학생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한 경찰이 해산시켰던 일 정도다. 이번 쿠데타가 그를 투사로 거듭나게 했다. “직접 몸으로 느꼈던 민주주의와 자유를 한순간에 다 뺏겼기 때문”이다. 그는 “길 걸어가다, 밥 먹다가도 밀림에서 힘들게 생각하는 친구들 생각이 난다. 최근엔 고향 친구가 시위대에 참여했다가 총을 맞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미얀마에선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하는데, 한국에 있는 내가 못 할 것이 뭐가 있을까’란 생각으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투쟁에는 고비가 있다. 최근 그는 고향의 가족과 국제전화를 하던 도중 도청을 당했다. 엄마와 은행 정보를 이야기하고 나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은 이가 동생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해이만흐닌씨는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가끔 지칠 때도 있다. 그런데 자국민이 이런 노력조차 안 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누가 신경을 써주겠나. 미얀마는 지금 의지할 수 있는 데가 없다.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와 폭력을 봐달라”고 말했다.
잊히지 않기 위한 싸움
최근엔 미얀마에선 상징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지난 11월 18일은 미얀마 공휴일인 더사웅몽(Tazaungmone) 풀문데이(Full moon day·보름달이 뜨는 날)였다. 버마식 달력으로 8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을 맞아, 우기의 종료를 뜻하는 동시에 승려들에게 새옷 등을 보시하는 날이다. 불교 전통이 강한 미얀마에서 전등을 밝히고 축제가 벌어지는 기간이다. 웨노에흐닌쏘씨의 설명을 빌자면 이를 둘러싸고 “젊은이들이 게릴라 활동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놀아도 되느냐”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그는 “아직 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점점 무뎌지고 잊힐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시민방위군이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그 지역 주민들이 숨겨주고 도와줘야 하는데, 협주하지 않으면 어디 가서 숨겠냐”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1000년, 2000년 다시 군화 밑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나만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닌가 검열하게 되고 죄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지치고 포기하기를 군부가 원하는 것”이란 해이만흐닌씨의 말처럼, 미얀마 시민들은 ‘잊히는 것’과도 싸우고 있다. 꼬흘라민툰씨(32)는 중고등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관해 강의했다. 국경지대에 살았던 그는 총소리가 흔한, 계엄령이 지배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그래도 우리가 알려줌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미얀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가져 최대한 빨리 평화롭게 이 사태를 끝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역사 앞에 당당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보자면 민주세력의 자금이 마르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다. 미얀마에서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자 직업을 관둔 공무원과 교사들, 코로나19와 쿠데타로 생계 곤란에 빠진 피난민을 도우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얀마 지원단체와 청년들도 가장 필요한 도움을 물었을 때 금전적 지원을 최우선으로 꼽는 상황이다. NUG는 최근 채권을 발행했다. ‘봄 혁명 기부채권’이란 이름 아래 100달러, 500달러, 1000달러 등으로 판매되는 채권에는 “미얀마 민족통합정부 기획재정부는 봄 혁명 기간 동안 2년 기간이 있는 기부채권을 판매합니다. 미얀마 내 군부독재를 완전히 타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투자한 것에 대해 역사에 기록합니다”라고 써 있다. 이자는 없다. 소모뚜 NUG 한국대표부 사무처장의 표현처럼 “이자는 미얀마의 자유와 민주주의”다.
최근 국내에선 미얀마에 보낼 의류가 모였다. NUG 한국대표부가 북부 산악지대로 피신한 미얀마 피난민을 위해 이달까지 겨울옷과 이불을 기부받고 있는데, 상당한 물량이 답지했다. 한국에서 의류를 모아 보내면 미얀마 현지에서 배분을 맡는다. 소모뚜 사무처장은 “최근 ‘미얀마의 일이 저희 일이 됐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수백만원으로 예상되는 운송비도 한편으로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치하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공개적으로 언급이 불가능했고, 한동안 ‘광주사태’로 불렸다. 엄혹한 시절을 거쳐 제 이름을 찾아가기까지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만큼이 고스란히 한국의 민주화 투쟁 역사이기도 하다. 2021년 미얀마인들이 벌이는 투쟁이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돼 나갈지는 미지수다. 꼬흘라민툰씨는 “‘많은 시민의 저항 끝에 군부쿠데타가 1년 안에 끝냈다’고 기록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웨노에흐닌쏘씨는 “이번 혁명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군부와 물리적으로 싸움은 안 될지언정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정의롭게 저항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투쟁을 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