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경제 후퇴 틈타 아시아·아프리카 독재자 장기집권 시도
권위주의 그림자가 세계 곳곳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을 핑계 삼아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정부 권한을 대폭 강화했고, 경제 후퇴로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독재자 자녀들까지 정치에 뛰어들었다. 힘겹게 독재를 청산했던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동남아 필리핀에서는 수십 년간 장기 집권했던 독재자의 2세들이 잇달아 대통령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아프리카 몇몇 나라는 독재국가를 넘어 ‘독재자 왕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지난 11월 6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 시민이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아들과 ‘스트롱맨’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 딸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사바|AP 연합뉴스
‘아랍의 봄’ 리비아, 독재자 아들 대선 출마 리비아는 2011년 ‘아랍의 봄’으로 42년간 철권통치했던 무아마르 카다피 전 최고지도자를 축출했다. 하지만 10년 만에 다시 독재자의 이름이 거리에 울려퍼지고 있다. 카다피의 둘째 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49)가 12월 24일 실시되는 대선에서 후보로 나서면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영국의 런던정경대(LSE)에서 유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이름 ‘세이프 알 이슬람’은 ‘이슬람의 칼’이라는 뜻이다.
카다피가 쫓겨나 반군에게 살해됐을 당시 아들 카다피도 서부도시 진탄에서 지역 민병대에 체포됐다. 아들 카다피 또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이후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6년형으로 감형돼 지난 9월 석방됐다. 여전히 전쟁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수배를 받고 있다. 그런 그가 10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대선에 나선 것이다.
아들 카다피는 ‘독재 정권 향수’를 부추기고 있다. 카다피 정권 붕괴 후 10년간 이어진 내전과 혼란 속에 과거 독재 정권이 낫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를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지역에서 카다피 가문은 여전히 인기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영국 BBC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에는 아직 독재에 대한 리비아 국민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가혹한 독재정치를 상징하는 ‘카다피’가 다시 정권을 잡기는 힘들 것이라 내다봤다.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 필리핀 대선 여론조사 1위 필리핀에서도 독재자 이름이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5~1986년 필리핀을 통치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64)이 내년 5월 열리는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면서다. ‘봉봉’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지난 11월 9일 보도된 마닐라타임스 대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68%를 얻으며 압도적인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86년 시민혁명인 ‘피플스 파워’가 일어나면서 축출됐고, 3년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숨졌다. 이후 마르코스 일가는 1990년대에 필리핀으로 복귀한 뒤 고향인 북부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아들인 마르코스 전 의원은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에 선출됐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1995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세 번 연임에 성공했다.

2011년 축출됐던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아들인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왼쪽 첫 번째)가 지난 11월 14일(현지시간) 리비아의 남서부 도시 사바에서 다음 달 치러질 대통령선거 후보로 등록한 뒤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 마닐라 | 로이터연합뉴스
마르코스 주니어 전 의원의 러닝메이트로는 현재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이 나선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와 부패를 몰아낸다며 대대적인 범죄 소탕 작전을 벌여왔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시아의 ‘스트롱맨’으로 불리는 그가 딸을 부통령으로 앞세워 정권을 이어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두테르테-마르코스 동맹이 내년 선거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고 분석했다. 수천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의 정치는 엘리트 가문 간 연합과 지역구도가 매우 중요하다. 두테르테는 남부 지역에서, 마르코스는 북부지역에서 견고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독재자-스트롱맨 주니어’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독재자 왕국’ 번져가는 아프리카 수십년간 장기집권한 지도자가 유독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는 이미 정권 대물림이 진행 중이다.
아프리카 차드는 30년 넘게 집권한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이 지난 4월 반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총상을 입고 갑작스럽게 죽자 아들이자 4성 장군인 마하마트 카카(37)가 다스리는 군사 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했다. 데비 대통령은 군 장교 출신으로 1990년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오른 뒤 30년간 철권통치를 이어왔다. 헌법까지 바꿔 가며 집권 연장을 시도했고 죽을 때까지 손에서 총을 놓지 않았다.
적도기니 또한 42년째 권좌에 앉아 있는 테오도로 오비앙 음바소고 응게마 대통령(79)이 아들인 테오도린 은게마 오비앙 망게에 후계를 물려주려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적도기니는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석유를 많이 생산하는 ‘부국’이지만 적도기니 국민의 76.8%가 극빈층이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의 이유는 독재와 부패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 일가의 호화로운 생활은 2019년 스위스 당국이 대통령의 아들이 소유한 슈퍼카 25대를 부패 혐의로 압수하면서 만천하에 알려졌다.
한국에서 승합차 이름으로 잘 알려진 ‘봉고’ 가문도 가봉에서 장기집권하고 있다. 1962년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한 가봉의 당시 오마르 봉고 온딤바 대통령 이름을 기아자동차가 신형차를 출시하면서 붙였고, 봉고 대통령의 이름은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42년이나 장기집권하며 가봉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았다. 2009년 봉고 대통령이 사망하자 아들인 알리 봉고가 그해 대선에서 부정 선거 시비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2016년 재선 당시에도 부정 선거 논란이 일었지만, 대통령직을 지킨 그는 현재 아들 노레딘 봉고 발렌틴을 대통령실 조정관으로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에 착수했다.
카메룬에서는 39년째 장기집권 중인 폴 비야 대통령이 아들 프랭크 비야를 유력한 대선 후보로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간다에서도 35년 장기독재를 이어오고 있는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이 아들 무후지 카이네루가바 장군을 2026년 대통령으로 만들려 고군분투 중이다. BBC는 “독재자들이 나랏돈을 정치 후원금처럼 활용해 대를 이어 정권을 유지하려 한다”면서 “정치적 부패와 억압이 뒤엉키며 성공 잠재성이 풍부한 아프리카 나라들이 후퇴를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이윤정 국제부 기자 y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