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하늘이 티 없이 파란 날씨에도 어두침침한 복도를 걷습니다. 아득하고도 아련한 철창 밖 풍경에 시선이 다다르기 전에 두 열로 행군하듯 다가오는 무리를 마주합니다. 제 또래로 보이는 이부터 갓 대학을 졸업했을 법한 앳된 얼굴의 청년까지. 새파란 죄수복과 군청색 교도관 제복 사이, 오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옷은 그들의 어중간한 위치를 뚜렷이 나타냅니다. 그들의 공식 명칭은 대체복무요원. 비공식 약칭은 ‘여호와’입니다. 저와는 다른 배경을 지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되거나, 대체역 심사위원회의 의결로 대체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예상했던 우려는 대부분 실현돼 대체복무요원 상당수가 죄수들이 하던 일을 대체합니다.
오전 11시, 구치소 밖에 있다는 식당으로 달리듯 빠져나가는 대체복무요원과 다시 엇갈립니다. 견장이 달린 제복만 보면 유난스레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에 죄수들은 어리둥절합니다. 누군가 대체복무요원의 행동을 군시절 장교를 대하는 징집병에 빗댑니다. 뭇 남성의 군대 무용담이 피어나고, 이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를 향한 혐오가 쏟아집니다. “폭력을 반대한다고? 몇대만 쥐어 패보면 알아. 보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 웬만해서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데 얼굴이 화끈거려 발화자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도 없습니다. 서로의 죄목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 불문율이 깨지는 순간이 잦습니다. 그렇지만 딱히 낯선 장면은 아닙니다. 법정에서 검사의 신문은 훨씬 더 가혹합니다.
오후 4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작업장에서 가슴을 옥죄는 과밀한 방으로 복귀해야 하는 죄수들이 긴 행렬로 늘어섭니다. 이제 일과를 마친 대체복무요원 무리는 구치소 바깥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 씻고 잠을 청할 테죠. 감방보다 나은 환경에서 휴식하면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려 애쓰겠죠. 동이 트면 죄수가 입장하는 문을 통과해 죄수가 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고 수용소와 담벼락을 공유하는 곳이 존재할 뿐이니까요. 대체복무요원의 복무기간은 3년, 죄수의 형기로 따지면 수억원을 사기로 갈취한 보이스피싱 범죄자와 비슷합니다. 복무기간을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도록 줄이기 위해 국회, 국방부, 언론에 목소리를 냈던 노력이 부끄럽습니다.
매일, 매시간, 매분 ‘인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체념이 깊숙하게 스미는 죄수의 신분을 대체복무요원과 겨뤄봅니다. 코로나19가 둘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 측면도 있습니다. 가끔이라도 바깥세상과 대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질 기회를 갖는 게 두 신분을 가르는 결정적 요소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대체복무요원의 숙소도 감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예감했던 그대로 대체복무요원은 죄수를 닮았습니다. 모든 병역거부자는 적어도 일과의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는 시기를 맞습니다. 현실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비극의 무게를 진정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국가의 잔혹한 폭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