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노인 또는 죽어가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노인과 죽어가는 사람이 처한 고립의 위험성을 중심으로 사회학적 진단을 내리고자 하며, 이것은 전통적·의학적 진단을 보완하는 의미를 가진다.”

노인요양원에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다. / 경향자료 | 이상훈 선임기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1982년에 발표한 <죽어가는 자의 고독>의 한 구절이다. 엘리아스는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였다. 나치 집권 후 유대인 박해를 피해 파리로 도피한 후 영국으로 망명했다. 1897년생으로 1990년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85세쯤, 본인이 얼마 남지 않은 삶과 마주해 쓴 책이다.
우리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는 자’다. 여기서 엘리아스가 들여다보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노년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다. 엘리아스는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건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과 산 사람의 상실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인간이 대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지옥이나 천국 같은 신화를 만들기도 하고, 숨기거나 억압함으로써 회피하기도 하고, 실존과 관련된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대 뒤로 쫓겨난 죽음
엘리아스는 사회적 맥락에서 죽음의 의미부터 주목한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변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종교 등 초자연적 믿음체계에서 위험과 죽음에 대한 구원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상대적 안정성, 예측 가능성, 기대 수명의 증가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삶은 길어졌고 죽음은 연기됐다. 죽음의 장면이나 시체는 이제 흔하게 볼 수 없으므로 죽음을 망각하기 쉬워졌다. 오늘날 죽음은 ‘배제’됐다.
심리적 의미의 배제는 심리학적 방어기제로 나타난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방벽처럼 세워놓은 방어적 환상을 흔들기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한다.
한편 사회적 의미의 배제는 엘리아스 자신의 이론인 ‘문명화 과정’의 한 측면으로 나타난다. 문명화 과정에서 인간생활의 원초적이고 동물적 측면들이 숨겨지거나 사라진다. 다른 동물적 측면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이 문명화 과정에서 사회생활의 무대 뒤로 쫓겨난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가족이 노인과 죽어가는 사람을 돌봤다. 그들은 대개 가족 생활공간 내에 머무르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니 노화나 죽음과 관련된 일은 모두 공개적으로 일어났다.
산업사회가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나이 들고 허약해진 사람은 사회나 가족, 친지로부터 격리된다. 대다수 사람은 퇴직하기 전까지 친구나 친지와 감정적 유대를 형성한다. 늙어가며 이런 관계들은 점차 약해진다. 양로원에 들어가면 오랜 감정적 유대가 끊어진다. 노인들은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격리되고 낯선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이런 정서적 고립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전 사회가 더 좋은 사회였다는 말은 아니다. 20세기 이전, 즉 가난하고 대규모 전염병에 시달렸던 과거에는 혼자 살고 혼자 죽는 것에 익숙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공동체의 삶에서 격리되지 않았다는 거다.

문학동네
엘리아스는 삶의 의미도 사회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개인에게 삶의 의미는 살아가면서 완성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의미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진정 외롭다. 죽어가는 사람이 산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이미 배제돼 있다고 느낀다면, 그 고독과 괴로움은 참혹하다.
삶에서 죽음을 배제해온 과정은 그대로 인류 진보의 역사다. 경제적 풍요로 더 잘 먹고 건강해졌고, 일상에서 폭력을 맞닥뜨리거나 예기치 않은 죽임을 당하는 일도 적어졌다. 의학이 발전했고 많은 질병은 퇴치됐다. 우리는 과거보다 건강해지고 길게 산다. 그러다 언뜻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살게 됐다. 혹은 잊은 척하고 살게 됐다. 엘리아스는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분석한다.
죽음을 수용해야 한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죽음을 배제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결국 정서적으로 고립돼 고독 속에서 쓸쓸히 죽어가야 한다면, 인류의 진보도 기실 절반에 불과하다. 진보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데, 고독 속에 죽어가는 것이라면, 개인적 차원에서의 역사의 진보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노년과 죽음에 대한 엘리아스의 사회학적 진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엘리아스의 진단이 던지는 함의는 분명하다. 고독 속에 쓸쓸히 죽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제할 게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모든 생명은 죽는다.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노년은 결국 닥치고, 누구나 예외 없이 죽는다. 죽어가는 과정을 숨겨놓아도, 아무리 위생적으로 만들어놓아도 소용이 없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살면서도,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본디 따듯한 정서적 연대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십대에 바라보는 죽음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젊었을 때는 죽음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오십이 지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친지의 죽음을 빈번하게 대면하게 됐다. 타인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 자신의 죽음과 비로소 마주하게 했다.
오십이라고 해서 벌써부터 죽음에 지나치게 예민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러나 엘리아스가 통찰한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삶 안에 놓아둬야 할 거다. 오늘날 죽어가는 자가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게 불가피하더라도, 그것을 준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을 거다.
죽어감의 고독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는 뭘까. 역설적으로 바로 삶의 의미이지 않을까. 삶의 종막까지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면, 그래도 덜 고독해질 거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의 용기’가 중요한 것 아닐까. 삶의 의미를 향한 용기 말이다. 의미 없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 오십 이후이지 않을까. 좀더 단호해져야겠다고 결심하는 시간이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