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현실 속 어른들을 위한 동화
제목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제작연도 2020
제작국 폴란드, 독일
상영시간 115분
장르 드라마, 판타지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마셀 엔그레르트
출연 알렉 엇가프, 마야 오스타 쉐브스카, 아가타 쿠레샤
개봉 2021년 10월 20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한겨울,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한 중산층 마을에 젊은 마사지사 제니아(알렉 엇가프 분)가 나타난다. 마사지용 침대와 도구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마다 예약 고객들을 방문하는 그는 늘 예의 바르게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한다. 뛰어난 손기술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지만 실상 그의 진면목은 최면술에서 빛을 발한다. 마사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면 그는 짧은 주문을 걸고 잠든 이의 내면은 깊은 치유의 숲 한가운데로 빠져들어 슬픔과 상심에 위로를 얻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사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만큼 떠돌이 제니아의 과거에 대한 의문도 커져만 간다. 제니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관심은 급기야 그들 안에 열망과 질투의 감정으로 변질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뜻밖의 결말을 맞이한다.
독특한 정서의 영화다. 주인공 제니아가 악몽 속에서 떠올리는 유년기 기억에 등장하는 체르노빌의 비극이나 엔딩크레딧에 등장하는 환경문제에 대한 메시지까지 작품 내내 꽤 노골적으로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가 구태의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함께 동반되는 따뜻한 정서와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전개는 보는 이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신비로운 배우 ‘알렉 엇가프’의 발견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상실’과 ‘구원’에 대한 갈망은 ‘욕망’으로 대변되는 성적 에너지와 헛헛한 풍자를 통해 치열하게 교차하며 서서히 끓어오른다.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큰 사건은 없지만, 개성 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소소하게 우러나는 다채로운 감정의 소묘는 묵직한 정서를 빚어낸다.
아름다운 화면, 서정적 음악 등과 더불어 다수의 배우가 펼쳐 보이는 출중한 연기의 앙상블은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는 중요 포인트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제니아 역을 맡은 배우 알렉 엇가프의 존재감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외모도 그렇지만 피아노 연주, 발레는 물론 다양한 감정을 편안하게 연기하는 다재다능한 그의 매력은 마을 사람 전체를 빠져들게 만든 마성을 관객들 역시 고스란히 경험케 한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영국에서 성장한 알렉 엇가프는 2010년 앤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이 주연한 <투어리스트>로 영화 데뷔한 이후 다수의 할리우드 대작 및 유럽영화에서 조연으로 경력을 쌓았다. 2019년 전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러시아 비밀기지에서 근무하는 괴짜 연구원 ‘알렉세이’ 역으로 국내 시청자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짧지 않은 배우 인생에 있어 첫 주연작이 된 <첫눈이 사라졌다>는 앞으로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힐 것이 분명하다.
세계가 주목한 미지의 여성 감독
대부분의 유럽 영화인들이 그렇듯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는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벨기에, 미국 등 다양한 국가를 넘나들며 작업을 진행했다. 국내 유일하게 개봉한 쥘리에트 비노슈 주연의 <엘르>는 프랑스, 폴란드, 독일 3개국 합작품으로 약간의 영어, 폴란드어와 함께 불어로 제작된 영화였고, <첫눈이 사라졌다> 바로 앞에 만든 <어린 양>은 아일랜드, 벨기에, 미국 합작영화로 영어작품이었다. 하지만 정작 베를린국제영화제 3관왕이라는 명예를 얻게 한 작품들은 모두 순수 폴란드 국적의 영화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의 모든 작품은 기본적으로 성(性)적 에너지가 넘친다. 감독은 이번 작품 역시 특정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태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육체의 관계가 결국 영혼의 관계로 바뀌는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연출 의도를 덧붙인다.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는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노매드랜드>의 최고 경쟁작!”이란 평가를 얻어냈고,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폴란드 대표작으로 출품됐다. 이외에도 전 세계 9개 영화제에 초청돼 15개 부문 노미네이트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극장 개봉은 미지의 감독을 발견하는 기회인 동시에 그가 완성한 최신의, 가장 매력적인 결과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는 국내 관객들에는 낯설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꽤 명망 있는 감독으로 대접받고 있는 인물이다. 1973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출생한 그는 우츠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단편과 다큐멘터리 작품을 통해 연출력을 쌓았다.
2000년 발표한 장편 데뷔작 <해피맨>부터 유러피안영화제 ‘올해의 발견’ 부문 후보로 지명되면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베를린국제영화제 3관왕에 빛나는 폴란드 여성 감독’이라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적한 시골 교구에 부임한 신실한 신부가 한 소년을 만나면서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삶 전체를 뒤흔드는 혼란을 겪게 되는 이야기 <인 더 네임 오브>(2013)는 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테디상을 수상한다. 후속작 <바디>(2015)는 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 감독상을 받았는데, 거식증을 앓고 있는 변호사의 딸이 상담시설을 통해 만난 상담사와 서로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불의의 사고 이후 주변인들에게서 소외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얼굴>(2018)도 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3편의 영화가 연이어 수상하는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3편 모두 국내엔 다양한 영화제를 통해 소개됐지만 정작 정식 개봉한 작품은 이보다 앞서 만들어진 <엘르>(2011)가 유일하다. 주연을 맡은 쥘리에트 비노슈의 인지도 덕이 컸을 것이다.
이번 작품 <첫눈이 사라졌다>는 특별히 촬영감독과 각본가로 오랜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마셀 엔그레르트와 공동연출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신비로운 분위기의 작품으로 완성됐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