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007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
제작연도 2021
제작국 미국, 영국
상영시간 163분
장르 액션
감독 캐리 조지 후쿠나가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라미 말렉, 라샤나 린치, 레아 세두, 아나 드 아르마스
개봉 2021년 9월 29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아아, 이걸로 끝인가. 근래에 보기 드문 최고의 몰입감을 안겨준 영화였다. 뻔한 장르적 클리셰의 총합이지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살짝 눈물이 핑 돈다. 청소년 시절 숀 코너리, 로저 무어와 함께 성장한 필자에게 그들을 대체할 다른 제임스 본드는 생각지도 못했다. 피어스 브로스넌도 마찬가지. 그런데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뭔가 달랐다. 맷 데이먼 주연의 본시리즈로 첩보액션물의 현실성이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시점에서 그는 등장했다. 벌써 15년 전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아마도)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제목은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 대충 중의적으로 번역한다면 ‘죽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액션과 볼거리가 몰아친다’ 정도의 약장사격인 제목이겠지만, 희망을 섞어 번역한다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라고도 할 수 있다.
전 세계 영화계에 몰아닥친 PC주의의 광풍으로 007 주인공도 ‘정치적 올바름’에 맞게 흑인 여성으로 바뀐다는 소문이 돈 것은 2년 전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 여성 러샤나 린치가 살인면허 007 코드네임을 받는다는 정보가 회자됐다. 그러니까 다니엘 크레이그 이후의 새 007시리즈의 주인공은 러샤나 린치가? 글쎄. 아직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을 위해 다 언급하지 않겠지만 영화 자막이 다 올라간 후 딱 한문장으로 메시지가 나온다.
‘노 타임 투 다이’의 중의적 의미
대부분의 007 영화는 본시리즈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지 않다. 이번 영화 한편만 보더라도 독자적으로 감상하는 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영화는 전작 <007스펙터>(2015)와 이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력이 된다면 영화를 보기 전에 한번쯤 봐두는 것이 좋다.
영화는 전작에서 미스터 화이트의 딸로 나온 마들렌의 어린 시절 사건에서 시작한다. 007시리즈에서는 매번 2~3명의 본드걸이 나오는데, 드디어(!) 제임스 본드가 안착하는 것은 마들렌이다. 마들렌은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호숫가의 집에서 여자아이를 홀로 기르고 있는데, 본드는 첫눈에 아이의 파란 눈이 자신을 닮을 것을 안다.
간략하게 스토리를 리뷰하자. M16은 비밀리에 헤라큘리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나노로봇에 암살대상의 유전자형을 집어넣어 소리소문없이 접촉한 사람만 골로 보내는 획기적인 암살방식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가 끝난 지 꽤 시일이 흘렀으니, 유전자 매칭 살인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올 법도 하다. 같은 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살인에 유전자를 활용한다는 것이 한사람만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이 기술이 흘러들어간다면 특정 가계(家系) 사람들만 전멸시킨다던가, 아니면 나치가 꿈꿔왔던 ‘최종해결’에 굳이 가스실 같은 것을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M16의 연구실을 급습한 스펙터 조직이 이 기술을 탈취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조직의 수장 M은 비밀에 부치고 이제는 은퇴해 자메이카의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제임스 본드를 찾는다.
흑인 여성배우의 007시리즈 만들어질까
뭐 이런 스토리는 몰라도 좋다. 영화는 시작장면부터 어찌 보면 클리셰 덩어리인 추격신을 보여준다. 좁은 골목길을 질주하는 슈퍼카와 오토바이 추격신, 자동소총, 급히 피하는 사람들… 그냥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여기에 코로나19로 당분간 보기 힘들어진 휴양지의 멋진 풍광까지.
생각해보면 007시리즈는 이미 하나의 장르다. 영화 초반에 헤어진 마들렌만 유일무이한 본드걸일 리 없다(전작에서도 모니카 벨루치가 제2의 본드걸로 나오지 않았던가!). 스펙터 본거지 잠입신에서 CIA 요원으로 ‘3주밖에 훈련하지 않았다’고 하는 팔로마라는 신참여성 요원이 파트너로 나온다. 이 역은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의 조이역을 맡았던 아나 드 아르마스가 맡았다.
사실 ‘마초’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인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클라크 게이블이나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이지 않았는가. 제임스 본드 없는 007시리즈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직 차기작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고 있는데, 흑인 여성배우 러샤나 린치 주연의 007 영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상이 안 된다. 이번 편에 캐릭터를 잡은 것을 보면 그저 M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는 공작 머신인데.
‘감옥 안에서 어떻게 원격으로 스펙터 회합을 주재하지?’라는 궁금증의 해답은 의안이었다. 블로펠트는 원격으로 접속된 의안을 통해 시공을 넘나들 수 있었다. 눈알에 대한 집착은 전작에서 스펙터의 악당 Mr. 힝스의 특기였다. 조직원의 눈알을 뽑는 그의 괴력이 인상적이었는지,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블로펠트는 본드를 붙잡고 그의 눈알을 뽑으려고 했다. 원래 영화에 대한 정보가 처음 나왔을 때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블로펠트역을 맡은 크리스토프 왈츠는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배역이 추가됐다. 뭐, 이번 편에서는 최종판 빌런 사핀의 ‘음모’로 한쪽 눈이 없는 채로 독살되니 다음에 다시 출연할 리는 없겠지만.
독일·오스트리아 국적의 연기파 배우 크리스토프 왈츠의 존재를 알린 영화는 아무래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의 나치 친위대(SS) 한스 란다 대령역이다(사진). 물론 주인공 레인 중령을 선한 역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는 순수악에 빙의된 듯한 미친 연기력으로 악역을 수행했다. 지난 2013년 한국을 방문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봉준호 감독과 이 영화와 관련한 대담에서 왈츠의 캐스팅을 두고 “왈츠가 왈츠(waltz)를 추며 내 앞에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 역으로 무려 27개 영화상을 휩쓸었다.
타란티노와는 <장고: 분노의 추격자>(2012)에서 장고역의 제이미 폭스와 함께 현상금 사냥꾼 닥터 킹 슐츠역으로 다시 합을 맞췄는데, 테리 길리엄의 <제로법칙의 비밀>(2013)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아직 주연으론 영화제 상을 받진 못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