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결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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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어떤 장면과 만날 때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흔히 쓰이는 단어 기시감. 실제로는 처음 맞닥뜨린 상황인데 마치 언제 어디에서 겪었던 일처럼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비슷한 느낌의 오래전 꿈속에서 경험한 것일 수도 있고, 영화나 소설 같은 콘텐츠를 통한 간접경험의 기억일 수도 있다.

영화 <레미니센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 <레미니센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아니면 ‘현재’라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금의 삶이 시간의 뒤틀림을 만나 과거, 미래와 혼재돼버린 것은 아닐까. 최근 ‘코인 악동’ 일론 머스크의 우주탐사 기업 스페이스X가 크루드래곤에 4명의 민간인을 탑승시켜 우주관광에 나섰다는 소식이 화제였다. 하지만 올해만 벌써 세 번째 접하는 뉴스다. 지난 7월 이미 리처드 브랜슨의 버진 갤럭틱이 우주관광상품을 선보였고, 바로 이어 제프 베이조스의 블루 오리진도 우주여행에 성공한 바 있다. 지금은 극소수 큰 부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값비싼 우주여행이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살면서 지구 위로 치솟아 우주로 나가보는 경험, 밖에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을 내려다보는 경험이 짜릿하고 대단할 것이란 생각은 든다. 역사 속 기차나 증기선처럼 우주여행에도 앞으로 스페이스 타이태닉에 삼등칸도 생기고, 타 행성 취업을 위해 가족을 떠난 노동자와 이민자들이 지구와 우주의 경계를 오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꽤 먼 미래의 일일 것이라 지금 이 지면을 낭비할 주제는 아니다.

오히려 올여름 개봉한 SF영화 <레미니센스>에 리얼리티가 담겨 있다. 가까운 미래, 기후위기가 덮친 지구는 이미 해수면이 상승해 대부분 도시가 마치 베네치아처럼 낮은 층은 물에 잠긴 수상도시가 돼 있다. 국가 간에 자원 획득 전쟁이 벌어지고, 시민은 우울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때 위안이 되는 하나의 기술이 과거의 기억을 3차원 홀로그램으로 또렷이 복원시켜주는 노스탤지어 기술. 사람들은 인큐베이터 같은 통에 들어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작품 속에 잘 그려지지 않지만, 미래를 포기하고 정신과 시선이 과거로 쏠린 시대에 그리 희망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과학기술, IT의 진화와 더불어 지금이 이미 과거인지, 그저 현재인지, 벌써 미래인지 빠른 변화의 시간을 주행하노라면 늘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종착점이 궁금하다. 미래는 우주를 개척하며 치솟는 유토피아일까, 자연의 인과응보에 얻어맞아 인류가 주저앉은 디스토피아일까. 우리가 배워온 그 착지점은 운명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행동이 결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주관광여행 뉴스와 SF영화 사이를 오가다가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의 갑질 등 현재 벌어지는 못된 관행과 불공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고, 이제 시행되기 시작한 구글 방지법의 순기능과 역기능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과학과 기술은 주체가 아니다. 인류 문명의 핵심요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인간 사이의 관계와 질서다. 플랫폼이라는 중의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도시, 국가, 사회 등 모든 유무형의 구조는 객체이며 주체인 인간의 삶에 봉사해야 한다. 인간을 착취하는 플랫폼? 과거도 아닌 미래에 그러한 것이 필요할까. 지구환경을 포함해 우주라는 우리 내면의 바깥, 노스탤지어를 지향하는 연약한 우리 외면의 안쪽, 그 경계와 균형을 생각하니 80년대 대학가 주점의 비행접시처럼 큰 파전과 찌그러진 주전자에 담긴 시원한 막걸리가 그립다.

<최영일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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