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가 인간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하다(unequivocal)’.”
지난 8월 9일(현지시간)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발표한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원인이 ‘인간의 활동’ 때문이라고 못 박으며 시작한다. 2013년 제5차 평가보고서에서 “인간의 영향이 확실하다(clear)”고 선언한 것보다 한결 더 강한 어조로 기후변화의 원인이 ‘인간’에 있다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한 것이다.

지난 2019년 그린란드 앞바다에서 빙하가 녹아 떠다니고 있다. / AFP연합뉴스
보고서는 앞으로 20년 안에 기온이 1.5도 올라가고, 해수면 상승으로 21세기 안에 남태평양 섬나라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자연이 아닌 인간 유래 기후변화가 폭염, 호우, 가뭄, 열대저기압 등 세계의 많은 기상·기후 극한 현상에 이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기후변화 피해로 인한 희생양은 주로 사회기반시설이 취약한 저개발 국가 주민이었지만 최근 북미, 러시아, 유럽, 중국 등 전 세계에서 극단적 기후가 관찰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수준의 온실가스 배출이 지속된다면 2021~2040년 중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1850~1900년) 시기 대비 1.5도 이상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는 2018년 ‘IPCC 1.5도 특별보고서’에서 제시됐던 2030~2052년보다 10년 앞당겨진 것이다. 이미 지구 지표면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2011~2020년 1.09도 올랐다.
태평양 섬나라들, 사라질 위기
IPCC 보고서는 이산화탄소 및 기타 온실가스 배출 수준에 따른 5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배출이 ‘높음’이나 ‘매우 높음’ 수준일 경우 100년 뒤 각각 3.6도, 4.4도의 기온 상승이 예상됐다. ‘중간’ 수준에서도 2도를 초과해 기온 상승이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온실가스를 가장 적게 배출하는 시나리오를 따르더라도 2040년까지 1.5도 이상의 온난화가 진행될 확률이 절반 이상이었다. 기온이 0.5도씩 상승할 때마다 폭염, 폭우, 가뭄 등 극단적인 기후 발생 빈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실렸다. 또 2050년 이전 최소 한 번은 9월 중 북극 해빙이 거의 다 녹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기온이 1.5도 이상 오르면 태평양 섬나라들은 절멸할 수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태평양 섬나라 전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틴드라 프라사드 주유엔 피지대사는 IPCC 보고서에 대해 “우리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라며 “50년에서 100년에 한 번 발생할 홍수와 폭풍이 10년마다 일어났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고 했다. 기후위기에 가장 취약한 전 세계 48개국을 대표하는 ‘기후 취약국 포럼(CVF)’을 이끌고 있는 모하메드 나시드 전 몰디브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기후위기에 취약한 국가들이 기후 비상사태의 최전선에 있다”면서 “다른 국가가 배출한 탄소 때문에 취약 국가들이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9일 발표된 IPCC ‘6차 평가보고서 제1실무그룹 보고서’의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본(SPM) 표지 사진
이제 기후변화는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7월 14~15일 대홍수로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바이에른주에서 180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캐나다, 그리스, 러시아 등에서는 산불이 끊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북극이 역사상 처음으로 연기로 뒤덮이기도 했다.
CNN은 “대도시 또한 기후변화에 무방비 상태”라며 최근 영국 런던 사례를 전했다. 지난 7월 25일 영국 런던에 폭우가 쏟아지자 도로는 강으로 변했고, 버스 승객들은 보트를 타고 구조됐다. 병원 일부가 침수돼 응급환자 외에는 퇴원 조치를 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런던 등 대도시들이 기후변화에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수년 전부터 경고해왔다.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런던의 배수시설은 집중호우를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리딩대학 리즈 스티븐스 교수는 “병원 응급실이 침수돼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우려된다”며 “중요한 인프라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류에 대한 ‘코드 레드’ 경고
세계의 지도자들도 IPCC 보고서 이후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번 보고서는 인류에 대한 ‘코드 레드(심각한 위기에 대한 경고)’”라고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신호”라고 했고,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 특사는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과 다른 길을 고르지 않으면 기후위기 충격이 계속 악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IPCC 보고서는 오는 11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 논의의 기본 토대가 된다. 196개 참여국은 2015년 파리기후협약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대안을 모색한다. 파리협약은 산업화 이전보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공동 목표를 세우는 성과를 거뒀지만 구속력이 없었다.

몰디브 바탈라섬 / 위키피디아
특히 세계 탄소배출량 1·2위인 중국과 미국의 참여 없이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총회에서 온실가스의 주범인 석탄화력발전을 중단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지만, 중국과 미국이 반대한다고 전했다. ‘세계의 굴뚝’ 중국은 세계 탄소배출 4분의 1을 차지하지만 탄소국경세 등에 반대해왔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구속력 있는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환경운동가들은 이번 보고서가 기후변화와의 싸움에 유의미한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환영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분명히 함으로써 향후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는 정부와 기업들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9년 네덜란드 환경단체들은 1만7300명의 공동원고와 함께 에너지기업 쉘을 상대로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더 높이라는 소송을 냈다. 지난 5월 네덜란드 사법부는 사상 최초로 기업의 탄소감축 목표를 강제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린피스 노르딕의 선임 정치 고문 카이사 코넨은 쉘을 상대로 한 승소 사례를 들며 “IPCC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과 기후변화 사이의 과학적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정부와 기업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법정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정 국제부 기자 y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