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질주하는 사회에서 ‘현역’으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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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나온 미국 작가 필립 K. 딕의 SF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2021년에 읽는 느낌은 색다르다. 모두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이 시대에 사무실이나 집에 있는 전화를 이용해야 하는 미래는 어색하다. 사냥해야 하는 안드로이드 목록은 서류로 가지고 다니고, 모두 다 텔레비전으로 <버스터 프랜들리>란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진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스틸컷 / 경향자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진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스틸컷 / 경향자료

SF라고 해도 1960년대 현재에서 상상한 미래라서 그렇다. 세계대전 후 지구는 방사능 낙진으로 오염됐다. 동물들이 죽기 시작했다. 지구에 태양이 비치지 않게 된 이후에는 식민화 프로그램이 강화됐다. 인류 대다수는 식민 행성으로 이주했다. 모든 이민자에겐 전쟁무기에서 개조된 안드로이드가 제공됐다.

딕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인간에 의해 파괴된 지구였다. 이 지구에는 이민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왜곡된 유전자 때문에 특수인으로 분류된 사람들만 남았다. 릭 데카드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화성에서 지구로 도주한 여덟 안드로이드를 쫓던 동료가 사고를 당하자 나머지 여섯의 추적을 맡았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

현상금 사냥꾼에게 중요한 일은 인간들 사이에서 안드로이드를 구분해 내는 임무와 그들을 파괴하는 ‘퇴역’이었다. 퇴역시킬 넥서스-6 안드로이드는 최첨단의 기술이 구현된 기종이었다. 그 지능은 일부 인간보다 높았고, 신체적으론 완전한 인간이라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 구분을 위해 만들어진 게 ‘보이트 캠프 개정판 척도’를 이용한 감정이입 검사였다. 인간이라면 끔찍하게 느낄 질문을 던지고 안드로이드의 반응을 살피는 거였다. 최첨단의 기종이라 해도 감정이입 능력을 갖고 있진 않았다.

이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 딕의 답변이다. 생각하고(호모 사피엔스), 두 다리로 걷고(호모 에렉투스), 도구를 쓰는(호모 파베르) 인간은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 정의된 인간이다. 딕은 지적 능력이 발달하고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를 비교 대상으로 인간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존재인 호모 엠파티쿠스라는 게 인간의 또 하나의 본질이다.

감정이입 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한 거다. 안드로이드가 학습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과 같은 무리 짓는 동물은 감정이입을 통해 생존율을 높인다. 감정이입 능력은 포식자에겐 방해가 된다.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성공한 자와 패배한 자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이 부재한 인간형 로봇은 인간과 다른 단독형 포식자일 뿐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세계에선 종교도 감정이입 능력에 기반을 뒀다. ‘머서교’ 신자들은 감정이입 장치를 통해 융합을 경험했다. 장치를 켜면 윌버 머서라는 남자가 언덕을 터벅터벅 올라가고, 이 머서에 정신과 육체가 융합한 신도는 그 ‘오르기’를 체험했다. 각자의 기쁨과 슬픔이 감정이입 장치에 접속한 모두에게 공유됐다.

릭이 열심히 사냥하는 건 진짜 양을 사고 싶기 때문이었다. 대멸종 이후 동물은 무척 귀하고 비싸졌다. 동물을 기르지 않으면 부도덕하고 반(反)감정이입적이라 비난받았다. 릭은 기르던 양이 죽자 다른 사람들이 진짜 양으로 생각하길 바라며 전기양을 길렀다.

폴라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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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양을 사기 위해선 열심히 안드로이드를 사냥해야 할 텐데 쉽지 않았다. 오페라 가수인 안드로이드를 찾아간 릭은 오히려 경찰서에 연행됐다. 릭을 안드로이드로 의심하던 경감이 정작 안드로이드였다. 릭은 경감을 퇴역시키고 다른 현상금 사냥꾼과 함께 경찰서를 탈출했다. 같이 간 현상금 사냥꾼이 오페라 가수를 퇴역시켰다.

릭은 자신이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릭은 현상금으로 진짜 염소를 샀고 안드로이드 레이첼 로즌을 만나 사랑을 나눴다. 레이첼은 이제 릭이 더 이상 안드로이드를 사냥할 수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도 릭은 남은 안드로이드들을 찾아내 퇴역시켰다. 안드로이드가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고 해도 릭은 자신이 감정이입했던 것들을 파괴해버렸다.

최고의 미덕은 공감과 배려

줄거리를 따라가던 나와 같은 독자는 망설임 없이 안드로이드들을 퇴역시키는 릭이 당황스럽다. 어마어마하게 남은 염소값을 치르기 위해서인지, 그게 자신의 직업이어서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릭 역시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에게 낯설고 부자연스러웠다. 릭이 패배감으로 황야를 헤매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은 영국 감독 리들리 스콧의 고전적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기 때문이다. 평생 생활고와 정신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 작가 딕은 1982년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되기 두달 전에 숨을 거뒀다.

소설의 내용과 영화의 내용은 적잖이 다르다. 하지만 그 소재와 문제의식은 같다. 오십을 넘어선 현재, 느닷없이 SF 소설을 꺼내 보는 까닭은 이 작품의 현재성에 있다.

나만의 경우는 아닐 텐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릴 적에는 우리 인간에게 사고하는 이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끼는 감정이 이성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게 됐다. 사고가 다른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데, 느낌이 다른 것은 수용하기 쉽지 않다.

이 느낌의 다른 말이 공감과 배려일 거다. 물론 사람마다 공감과 배려의 방식이 다를 거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들이 그 누가 됐든 공감과 배려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되고 싶지 않다. 감정이입이야말로 오십 이후에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지 않을까.

소설 속 무대는 1992년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무대는 2018년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모두 미래의 변화를 과장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가 이미 열렸다고 해도 소설 속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필요할 거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앞으로 남은 30~40년의 삶에서 언젠가 그런 안드로이드를 보게 될 거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뉴스가 넘쳐난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우주여행 등의 뉴스를 보면 변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노년의 입구에 서 있는 나는 이 속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속도에 편승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변화를 마냥 무시하며 살아가는 걸 원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속도가 강제하는 현기증만은 느끼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다짐한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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