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가격 인상 짙어지는 불평등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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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인상 가시화… 백신 불평등이 세계 경제 발목 잡아

미국 제약사 화이자와 모더나가 코로나19 백신 가격을 올렸다. 유럽연합(EU)을 시작으로 다른 국가들에도 도미노 가격 인상이 우려된다. 제약회사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겠지만, 가난한 나라는 백신을 구하기 더 어려워졌다.

인도인들이 8월 2일(현지시간) 뭄바이의 한 코로나19 예방접종 시설에서 백신을 맞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뭄바이|AP연합뉴스

인도인들이 8월 2일(현지시간) 뭄바이의 한 코로나19 예방접종 시설에서 백신을 맞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뭄바이|AP연합뉴스

파이낸셜타임스는 8월 1일(현지시간) 두 제약회사가 EU에 납품하는 코로나19 백신 가격을 각각 25%, 10%씩 올렸다고 보도했다. 화이자 백신 가격은 1회분당 15.5유로(2만1000원)에서 19.5유로(2만7000원)로 올랐다. 모더나 백신은 22.6달러(2만6000원)에서 25.5달러(2만9000원)가 됐다.

코로나19 백신 원가 3300원

두 제약사는 2023년까지 코로나19 백신 21억회분을 EU에 납품하기로 했다. 자사의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이 옥스퍼드대·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백신보다 효능이 높다는 3상 임상시험 결과가 나오자 가격 재협상을 요구했다.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코로나19 대유행 중에 백신 가격을 인상하는 것은 불이 났는데 물값을 올리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백신 가격은 어떻게 책정할까. 화이자는 국가소득별 가격 연동제를 제안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중간소득 국가는 고소득 국가가 내는 비용의 절반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가격은 나라별로 다르다. 콜롬비아는 화이자 백신 1회분당 12달러(1만4000원)를 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0달러(1만1000원)를 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전했다. 미국은 1회분당 19.5달러(2만2000원)를, 영국은 15파운드(2만4000원)를, 이스라엘은 28달러(3만2000원)를 냈다.

국제단체는 제약사가 백신 가격을 원가보다 최소 5배 비싸게 책정했다고 지적한다. 미국 시민단체 ‘퍼블릭 시티즌’과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연구팀은 메신저 리보핵산(mRNA) 생산기술을 분석한 결과 화이자 백신 원가는 1회분당 1.18달러(1400원), 모더나 백신은 1회분당 2.85달러(3300원)라고 밝혔다.

화이자 백신을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주고 산 이스라엘은 원가의 24배를 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가난한 나라에 백신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출범한 코백스(COVAX)도 원가보다 최소 5배를 더 냈다. 국제앰네스티, 옥스팜 등이 모여 만든 국제시민단체 연합인 ‘피플스 백신 얼라이언스’는 “백신 독점이 없었다면 코백스가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중저소득 국가의 모든 국민에게 백신을 접종할 수 있었겠지만, 코백스는 올해 말까지 기껏해야 23%를 접종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코로나19 백신의 부스터샷 필요성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정부 고위 관리들과 면담한다고 AP통신 등이 지난 7월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 런던|AFP연합뉴스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코로나19 백신의 부스터샷 필요성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정부 고위 관리들과 면담한다고 AP통신 등이 지난 7월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 런던|AFP연합뉴스

화이자는 백신 생산량의 90%를 부국들에게 팔았는데, 부국들이 낸 기회비용도 크다. 이탈리아는 백신 구매에 41억유로(5조5800억원)를 더 냈다. 4만개 넘는 중환자실을 설치하거나, 4만9000명 이상의 의사를 고용할 수 있는 돈이다. 독일이 더 낸 57억유로(7조7580억원)로는 10만명의 의료종사자를 고용할 수도 있었다.

옥스팜의 건강정책관리자 안나 매리어트는 “가난한 국가에서 더 많은 의료시설을 짓는 데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예산이 이 강력한 기업의 CEO와 주주들에게 약탈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이즈 약값 570만원→11만원

제약사들은 특허권을 무기로 높은 약값을 책정해왔다. 화이자와 영국 제약사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이 특허를 보유했던 폐렴구균 백신의 사례를 보자. 폐렴은 39초마다 어린이 한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다.

국제구호단체들은 2017년 초까지만 해도 그리스의 난민 아동에게 접종할 폐렴구균 백신 1회분당 가격으로 60유로(8만2000원)를 냈다. 화이자와 GSK는 국제구호단체에 다른 나라에 제공하던 최저 가격의 20배를 책정했다. 요르단, 태국, 필리핀 등 저소득 국가 어린이 수백만명이 백신을 맞지 못했다. 두 제약사가 백신 가격을 낮춘 건 인도 최대 제약사인 세럼인스티튜트가 복제약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난해 12월부터였다. 두 제약사는 오리지널 백신 가격을 60유로(8만2000원)에서 3달러(3400원)로 확 낮췄다. 세럼인스티튜트가 제공한 복제약 가격은 2달러(2300원)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에이즈 치료제를 두고 제약사와 정부가 소송전까지 벌였다. 남아공은 1996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는데, 당시 에이즈 환자 한명이 내야 하는 1년치 약값이 5000달러(570만원)이었다. 당시 남아공 1인당 국내총생산(GDP) 3500달러(400만원)보다 약값이 더 비쌌다. 가난한 에이즈 환자들이 죽어가자 남아공 정부는 특허권을 일시 유예하는 ‘강제 실시’ 제도를 발동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39개 초국적 제약사가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에 돌입했다. 전 세계에서는 제약사의 탐욕을 비판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비판 여론에 못 이겨 제약사는 소송을 포기했고, 제약사가 특허를 포기하자 약값은 이전의 50분의 1인 100달러(11만5000원)로 떨어졌다.

인도 뉴델리의 공터가 지난 4월 28일(현지시간) 화장을 기다리는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다. / 뉴델리|로이터연합뉴스

인도 뉴델리의 공터가 지난 4월 28일(현지시간) 화장을 기다리는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다. / 뉴델리|로이터연합뉴스

남아공과 인도를 비롯한 세계 100여개국은 지난해 WTO에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특허를 일시 유예하자고 제안했다. 지식재산권협정(TRIPS·트립스)이 보장한 특허를 유예하려면 WTO 회원국 4분의 3이 찬성해야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특허 면제에 찬성한다는 폭탄선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으나, 지난 6월 EU 정상회의를 거치면서 ‘자발적 백신 기부’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물러섰다.

백신 개발에 공적자금 들어갔다

제약업계는 강제실시 제도가 혁신 의지를 꺾는다면서 치열한 로비전을 벌이고 있다. 반면 시민단체는 코로나19 백신이 공공재라고 주장한다. 모더나는 미국 정부로부터 개발비 등 공적 자금 57억5000만달러(6조6040억원)를 지원받았다. 화이자와 코로나19 백신을 공동 개발한 바이오엔테크는 독일 정부로부터 공적 자금 25억달러(2조8700억원)를 받았다.

백신 특허 유예는 사람의 목숨을 살릴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제약업계를 제외한 나머지 산업에 이익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5월 보고서에서 코로나19 백신이 전 세계에 신속하고 골고루 분배된다면 내년 세계 경제 성장률은 5∼6%까지 오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3%로 낮아진다고 예측했다. 백신 불평등이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김윤나영 국제부 기자 nayo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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