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성찰하는 열정의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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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도다./ 그 순간을 향해 나는 말할 수 있으리,/ “머물러라, 너 그렇게 아름답구나”./ 내 이 세상에서의 삶의 흔적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 지고의 순간을 향유하노라.”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만남’, 조제프 페이, 1846 / 경향자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만남’, 조제프 페이, 1846 / 경향자료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파우스트>의 한 구절이다. “머물러라, 너 그렇게 아름답구나”란 말을 만났을 때 기막힌 심정을 갖게 된다. 설명하려면 좀 길다. <파우스트>의 줄거리는 신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놓고 신에게 내기를 청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자기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자신했다. 신은 인간이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지만 결국 올바른 길로 들어설 거라며 제안을 수락했다.

신과 악마의 내기

평생 학문에만 정진해온 파우스트는 앎의 회의에 부딪힌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삶의 기쁨과 멀어지고 세상의 영화를 누리지 못한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결행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천사들의 합창이 들려오고 파우스트는 삶으로 돌아온다. 파우스트의 두 영혼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한 영혼은 사랑의 환락 속에서 세속적인 데 머무르려 하고, 다른 영혼은 숭고한 선인들의 경지에 오르려고 한다. 영혼의 갈등은 메피스토펠레스가 파고들기 좋은 틈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전을 받아들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향락으로 파우스트를 속일 수 있고 파우스트가 스스로에게 만족한다면, 그것을 삶의 마지막 날이 되게 하자는 내기다. 약속은 파우스트가 어느 한순간을 향해 “머물러다오! 너는 너무도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면 자신을 결박해도 좋다는 거다. 그리고 늙은 파우스트는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이 말을 결국 내뱉는다.

흥미로운 건 이 순간을 재현하는 괴테의 상상력이다. 파우스트는 황제의 전쟁을 도와 제국의 해안을 봉토로 받고, 그곳에서 간척사업을 벌인다. 파우스트는 언덕 위의 전망대를 세우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을 빌린다. 메피스토펠레스 부하들은 언덕 위의 오두막에 있던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고, 오두막은 불타버린다.

이 상황에서 ‘근심’이 파우스트의 방에 찾아든다. 근심에게 파우스트는 자신이 오직 갈망했고 성취했으며 일생을 돌진해왔다고 말한다. 근심은 평생 눈먼 존재가 인간들이라며 파우스트의 눈이 멀게 되는 저주를 내린다. 눈먼 파우스트는 삽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수로 공사를 독려한다. 새로운 땅에 천국 같은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파우스트는 지금을 ‘지고의 순간’이라고 선언한다.

책세상

책세상

그런데 그 삽질 소리는 다름 아닌 무덤을 파는 소리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지금 지고의 순간을 향유한다고 선언한 파우스트는 그대로 땅 위에 쓰러진다. 그의 영혼이 계약에 따라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찰나다. 무덤을 파는 소리를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소리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긴 작품을 읽으며 달려와 마주하는 “머물러라, 너 그렇게 아름답구나”는 앞서 말했듯 기가 막히고 쓰디쓰다.

착각만 이 장면을 쓰디쓰게 만드는 건 아니다. 파우스트는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자신의 꿈을 추구한다.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세상으로 나아간 파우스트는 지나간 자리마다 폐허를 만들어놓는다.

그레첸과 헬레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가 가지고 온 보석으로 그레첸의 환심을 산다. 파우스트를 사랑하게 된 그레첸의 결말은 비참하다. 그레첸 가족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레첸은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까지 살해한다.

또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유혹한다. 헬레네는 아름다움으로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일으킨 여성이다. 파우스트와 헬레네 사이에 태어난 오이포리온은 무모함과 욕망으로 한없이 높은 곳으로 오르려다 결국 떨어져 죽고 만다.

헬레네까지 떠났지만 파우스트는 변하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해안을 덮쳤다 물러가는 파도를 향해 분노한다. 이 근대인은 자연의 비생산성과 무목적성을 참을 수가 없다. 파우스트는 바다를 바다 안쪽으로 쫓아버리는 ‘값진 즐거움’을 위해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정말 피곤한 인간이다. 그는 어디선가 멈춰야 했다. 맨 마지막 장인 2부 5막 궁전 장면에서 생각에 잠겨 거닐던 늙은 파우스트는 거기서라도 멈춰야 했다. 성찰 없는, 무모한 열정의 끝은 <파우스트>의 부제인 ‘한편의 비극’ 그 자체다.

파우스트적인 20세기 서구 역사

<파우스트>는 오래된 책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1773년에 집필하기 시작해 1831년에 끝맺었다. 파우스트는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으로 꽃핀 17~18세기의 계몽주의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확장시킨 18세기의 산업혁명을 한 몸에 구현한 인간형이다. 동시대에 대한 괴테의 문학적 탐구가 경이롭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가는 곳마다 폐허를 만들어놓은 성찰 없는, 그리고 무모한 열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을까. 끝없이 식민지를 건설하고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20세기 서구의 역사는 그 자체가 파우스트적이다. 21세기는 좀 나을까. 결국 천사들이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로부터 구해냈던 결말을 볼 수 있을까.

파우스트는 지고의 순간을 향해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지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그가 지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파국의 순간’이었다. 비극을 피하려면 어디선가 멈춰야 했다. 파우스트에게 결여된 것은 잠시 멈춰 돌아보는, 자신의 생각을 생각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성찰의 힘이다.

이게 내 방식의 <파우스트> 독서법이다. 불멸의 고전인 만큼 <파우스트>를 읽는 방식은 여럿일 거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그것에 담긴 의미와 교훈이 열려 있다는 데 있다. 50대가 돼서 다시 만난 <파우스트>는 내게 성찰 없는 열정이 나의 삶은 아닐 거라고 깨닫게 했다. 나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 걸까?

젊은 날의 열정이 가치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모한 열정을 발휘하기에 50대란 나이는 너무 늦다. 이제는 성찰하는 열정의 삶을 살고 싶다. 성찰하는 열정의 삶은,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인생의 새로운 화두 하나를 건진다.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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