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췌장암으로 6월 7일 하늘의 별이 됐다.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병마와 싸웠던 그는 1년 전 같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곁에 묻혔다. 동고동락했던 한일월드컵 멤버들은 고인이 남긴 숱한 추억을 되짚으며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2021년 6월 9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대한민국 대 스리랑카의 경기에 앞서 전광판에 췌장암 투병 끝에 숨진 유상철 전 감독을 추모하는 헌정 영상이 나오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유상철은 팔방미인이었다
현역시절 유상철은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재능으로 인정을 받은 선수였다. 서울 응암초 4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처음 축구에 입문한 그는 경신중·고를 거쳐 건국대를 졸업했다. 건국대 졸업반 시절에 신입생 유상철을 처음 만났던 황선홍 전 서울 감독은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다. 졸업반이라 일년 내내 국가대표팀에 소집돼 추억이 많지는 않지만, 참 재주가 많은 팔방미인이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황 감독이 직속 후배를 팔방미인에 비유한 것은 당시 한국축구에선 개념조차 없었던 멀티플레이어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황 감독은 “분명 공격수로 입학했는데 경기는 미드필더로 뛰었고, 프로 무대에선 수비수인 윙백으로 뛰더라. 그런데 그걸 또 잘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상철은 199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그해 수비수로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뽑혔다. 1998년과 2002년에는 각각 미드필더와 공격수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돼 특수 포지션인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유상철이 2006년 울산에서 은퇴할 때까지 K리그에서 남긴 기록(142경기 37골 9도움)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위업이다.
유상철의 독특한 재능은 사실 소속팀보다 대표팀(A매치 124경기 18골)에서 더욱 빛났다. 한국축구가 큰 실망을 안고 돌아온 1998 프랑스월드컵이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시 그는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선 중앙 수비수로 뛰었지만, 네덜란드전과 벨기에전은 왼쪽 윙백으로 뛰었다. 유상철이 전성기에 접어든 한일월드컵에선 미드필더로 출발해 교체 선수에 따라 계속 위치가 바뀌는 흥미로운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16강전이 그랬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내주면서 0-1 끌려가자 김태영과 홍명보, 김남일을 대신해 황선홍과 이천수, 차두리를 잇달아 투입했다. 공격 카드를 늘려 승부를 뒤집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유상철은 스리백의 왼쪽 중앙 수비수에서 포백의 중앙 수비수, 그리고 다시 스리백의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과 전술 변화를 모두 소화해내는 기적을 보여줬다. 유상철이 든든하게 수비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지 않았다면 설기현의 극적인 동점골도 안정환의 짜릿한 역전 결승골도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선수로 동기였던 최진철 전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당시에는 멀티플레이어라는 표현도 드물었던 시절”이라며 “남들은 하나도 잘하기 힘든데, 참 부러웠던 친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도자를 해보니 왜 히딩크 감독님이 (유)상철이를 아꼈는지 알겠다. 선수로는 참 보물과 같았다”고 덧붙였다.

유상철 선수가 2002년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추가골을 넣고 포효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유상철은 악바리였다
유상철이 팬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악바리와 같은 투혼도 영향을 미쳤다. 유니폼이 찢어지고, 눈두덩이에서 피가 흘러도 포기하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열정은 팬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코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헤딩 결승골을 터뜨린 장면은 이듬해 한일월드컵 폴란드전 득점과 함께 유상철의 자랑거리였다.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은 “평소엔 다정다감한 이가 한국축구의 투혼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최진철 감독도 “참 악바리였다. 선수로 승부욕이 강했고,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동료들이 악바리라 불렀던 그의 투혼은 그라운드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신고 2학년에 올라갈 무렵 160㎝에 불과한 작은 키로 축구를 포기할 뻔했던 터. 다행히 졸업하기 전 20㎝ 넘게 키가 자랐지만, 그 전까지는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야 했다. 유상철의 남다른 의지를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그는 축구화를 벗은 2006년 왼쪽 눈이 실명에 가까운 상태로 뛰었다는 걸 뒤늦게 공개했다. 공간 감각이 부족해 ‘테크닉이 부족한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그의 안타까움이 뒤늦게 이해된 순간이었다.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걸 극복한 것”이라며 “그래서 췌장암도 이겨낼 줄 알았다”고 말했다.
유상철의 열정과 투혼은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살면서도 똑같았다. 춘천기계공고에서 지휘봉을 잡은 그는 대전 시티즌(현 하나 시티즌)에서 처음 프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울산대에서 지도자로 자신을 갈고닦은 그는 전남 드래곤즈를 거쳐 2019년 인천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설기현 경남FC 감독은 “성균관대를 맡고 있을 때 울산대를 지도하던 형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던 기억이 난다. 남들과 똑같은 축구보다 새로운 축구를 위해 노력하던 분이었다. 그래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상철은 강한 지도자였다
남다른 책임감은, 꼴찌로 강등 위기에 몰린 인천 소방수로 부임한 지 몇달 되지 않은 시점에서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을 때 도드라졌다. 주변에선 먼저 치료를 권했으나 인천이 극적으로 1부에 잔류한 뒤에야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최 감독은 “상철이가 어떤 지도자였는지 모두가 알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자로 고인의 마지막 소망은 역시 그라운드 복귀였다. 인천에서 마침내 자신의 축구 철학의 방향을 잡았던 터. 언젠가는 대표팀 감독으로 더 큰 무대에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날아라 슛돌이>에서 가르쳤던 제자 이강인(발렌시아)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황 감독은 “상철이는 선수나 지도자를 떠나 사람으로도 최고였다. 이런 사람을 너무 빨리 잃었다”고 말했다. 최용수 SBS 해설위원도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해줘야 할 몫이 많은 친구였다”며 고인이 이루지 못한 꿈에 탄식했다.
<황민국 스포츠부 기자 stly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