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시 개봉한 냉전첩보물 걸작
제목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
제작연도 2011
제작국 영국
상영시간 127분
장르 스릴러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출연 게리 올드만,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하디, 마크 스트롱, 스티븐 그레이엄, 존 허트
개봉 2021년 4월 8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 ㈜화인픽처스
배급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시사회장에서 영화사 측에 물었다. “왜 재개봉하나요?”, “처음 개봉할 때는 번역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알려진 이슈다. “그것뿐입니까?”, “처음 개봉했을 때 너무 안 알려져 흥행에 실패했잖아요.” 그건 맞다. 이 영화, 냉전시대 스파이물의 걸작이다. 등장인물도 휘황찬란하다. <셜록>으로 유명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이후 <어벤져스> 시리즈의 ‘닥터 스트레인지’로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영화에서 ‘테일러’, 그러니까 양복쟁이라는 별명으로 출연하는 콜린 퍼스는 그후 같은 감독의 영화 <킹스맨>
시리즈에서 양복가게로 위장한 첩보조직의 비밀요원으로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Manner maketh man)’라는 유행어의 주인공이다. 생각해보니 영화에서 영국 비밀기관 서커스의 현장요원이었던 마크 스트롱도 <킹스맨> 시리즈의 멀린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는 1970년대 스타일의 장발을 한 괴짜 독거남쯤으로 나오지만. 영화의 주인공 조지 스마일리는 또 어떤가.
<레옹>에서 마약을 먹고 총을 난사하는 미친 경찰 역의 게리 올드만이다. 배우들의 팬이라면 스크린에서 이들의 10년 전 명품연기를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일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물로 생각하고 극장 문에 들어선다면 당황할 것이다. 본 시리즈처럼 극사실적 액션신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영화는 크게 배신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거리에서 교통사고를 유발하며 추격신을 하는 걸 세상 어떤 ‘진짜 스파이’가 선호할까. 스파이의 최고 덕목은 눈에 띄지 않은 평범함이다. 그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풍경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유명 배우들의 10년 전 명품연기
영국 첩보기관 ‘서커스’의 국장 ‘컨트롤’은 비밀리에 현장요원 짐 프리도를 불러 헝가리로 가서 망명의사를 밝힌 장군을 접촉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장군이 자신의 망명 대가로 제공할 정보는 서커스 내에 암약하고 있는 두더지, 그러니까 이중간첩의 명단이다. 컨트롤이 생각하기에 심각한 것은 이 두더지가 현장요원이 아니라 수뇌부에 있기 때문이다. 컨트롤은 각자에게 영국 동요에 따라 암호명을 부여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 ‘배거맨’ 이들 중 어느 하나(어쩌면 2명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배신자라고 컨트롤은 믿고 있다.
어쨌든 그런데 작전은 실패한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접선 현장을 떠나려는 짐 프리도는 서빙 종업원으로 위장한 동유럽 첩보원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냉전 당시 공산권에서는 이 스파이 사건을 이슈화하고, 컨트롤은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자신의 왼팔이었던 조직의 2인자 스마일리와 함께. 조직 내에 암약한 두더지의 승리다. 컨트롤은 병원에서 사망하고, 그로부터 ‘조직 내에 이중간첩이 있다’는 말을 들은 재무장관은 유유자적 한가로운 삶을 보내고 있던 스마일리를 불러 조사를 시킨다. 두더지를 찾기 위한 탐문 과정에서 스마일리는 뜻밖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영국 첩보조직 내 두더지를 활용한 까닭은 영국 내부정보가 목표가 아니었고, 영국과 손을 잡은 미국 측의 조직을 붕괴시키려는 대계획의 일환이었다.
영화의 원작은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꽤 탄탄한 팬층을 가진 소설이다. BBC에서 만든 미니시리즈도 있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2시간 7분짜리 영화로 축약하다 보니 많은 배경설명이 빠져 있다. 위 작전실패의 무대도 원작은 홍콩이지만 헝가리로 변경됐다.
한국에서 남북 이중간첩물로 번안된다면
재개봉을 하면서 영화사 측은 박찬욱 감독이 과거 개봉 때 이 영화를 두 번 봤다는 것을 홍보 포인트로 삼은 모양이다. 박 감독은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나. 글쎄.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박 감독은 이런 형식과 분위기의 첩보물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은 안다. 한국식으로 번안한다면 어떤 것일까. 국정원 최고위층에 암약하고 있는 북한의 이중간첩?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핵심인사들의 상당수가 레드 컴플렉스 극복을 넘어 ‘선을 넘은’ 경험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설정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반공 프로파간다를 담은 체제 선전 영화를 뺀다면 1980년대 치열했던 이념 모색을 진지하게 조명하거나 성찰하는 영화는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영화가 나오길 기대해본다.
영화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원작자 존 르 카레는 영국 정보부 출신이고, 자신이 근무할 때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 사건이다. 영국 정보부(MI6)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소련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던 사건이다. 5명 모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나온, 말하자면 영국의 엘리트들이 알고 보니 ‘이념의 조국’ 소련을 위해 정보를 빼내 건넸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호의적이었던 20세기 초중반의 영국 대학 분위기다. 일찍부터 영국 대학 내 좌익의 활동에 주목한 소련은 전략적으로 이들을 육성했다. 대학시절부터 좌익활동과는 단절하고, 의도적으로 우익활동에 참여하게 하는 등의 신분세탁·위장 과정을 거쳤다. 사건을 정리해놓은 문서를 보면 소련 측의 의도는 처음부터 정보기관에 들어가 암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국정원 같은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도 이 사건을 벤치마킹해 모종의 스크린 프로그램을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사건의 주인공격인 킴 필비(사진)는 미국과 영국의 조사망이 좁혀오자 1963년 베이루트를 거쳐 소련으로 망명했다. KGB에 취직한 필비는 자서전까지 발간하고 천수를 누리다 1988년 세상을 떠났다. 1991년 소련이 몰락하기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던 셈이다. 정리해놓은 글에 따르면 소련으로 망명한 후 필비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무척 고뇌했다고 한다. 월북을 선택한 몇몇 지식인들도 생존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