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하우스의 미나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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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지난 세기일 뿐 아니라 무려 지난 밀레니엄 시대에 PC통신이라는 것이 생겨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골방 구석의 잉여인들이 원시적(?)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됐다. 고민과 꿈과 인생을 얼굴 한 번 못 본 익명의 친구들과 나누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곧 IMF가 닥쳤고, 세기말을 통과하며 문명은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가 도래했다. 집단적 문자채팅 소통은 게시판 문화로 바뀌었고, 사이버 세계는 공공 공간에서 개인 공간 중심으로 변화해갔다. 내 방으로 놀러와,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블로그 기반으로 내 집들이 들어찼다. 이후 플랫폼은 빠르게 바뀌어 모바일로, 스마트폰 기반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가 트렌드를 이뤘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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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핵심적으로 바뀐 것은 ‘시간’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TV 시청 방식이 과거의 본방 사수보다 내가 편한 시간에 찾아보는 VOD 방식의 ‘다시 보기’가 일상화되면서 ‘실시간,’ ‘동시간’이었던 공동체적 시간이 파편화된 것이다. 개인은 시간자율성을 얻었지만, 공동체성은 약화됐다.

이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는 최근 등장한 SNS 하나가 시간을 거슬러 1990년대 PC통신의 동시간 집단소통의 감흥을 되살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클럽하우스. 사실 특징은 별것이 없다. ‘초대’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고 참여 희망자들을 들썩이게 했던 점은 마케팅 전략으로 보이고. 아이폰 사용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득과 실을 함께 가지고 있는 배제전략으로 안드로이드 버전을 개발 중이라니 지켜볼 문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음성기반 채팅서비스라는 점이다. 서너명에서 수백명까지 하나의 방, 하나의 클럽에 모인 사람들은 얼굴은 작은 프로필 사진 한장으로 익명에 가깝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듯한 통화품질로 느껴지는 꽤 괜찮은 음질로 지구촌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즉석 대화가 가능하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외로움을 나누고, 생활정보를 나누고, 인생을 공유하고, 또 야심을 겨루며 ‘인싸’와 ‘아싸’가 어울려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진다.

지난 설 명절 연휴, 클럽하우스에서 오프라인의 1~2년 기간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뉴욕에서 공무원으로 방역 일선을 뛰고 있는 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 앤드류와 그의 부인 아그네스, 뉴욕의 씩씩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클레어, 런던의 프린스 지원, 하얼빈의 유전학자 김우재 교수, 서울의 새미 등은 최근 화제가 된 영화 <미나리>를 소재로 자신들의 이야기 나누고 또 나눴다. 미국에서 먼저 개봉한 작품이기에 교민 다수가 먼저 봤고, 3월 국내 개봉 후 필자도 보았다.

영화 <미나리>. 1980년대 미국 땅에 정착하고자 악전고투하는 이민 1세대의 이야기지만 그게 어디 특정 시대, 특정 국가와 지역, 땅만의 문제이랴. 인간이 마음을 심고 정착해 미나리꽝처럼 생태계를 이루는 곳이라면 가상공간 속 클럽하우스도 신개척지다. 그래서 새로운 가상 가족은 서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클럽하우스의 미나리들이라고.

<최영일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이사·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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