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인물에 근거한 현대적 사랑의 재해석
제목 암모나이트(Ammonite)
제작연도 2020
제작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상영시간 118분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프랜시스 리
출연 케이트 윈즐릿, 시얼샤 로넌, 피오나 쇼, 제임스 맥아들
개봉 2021년 3월 11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1840년대 영국 남부 해변마을, 노모(젬마 존스 분)와 사는 고생물학자 메리(케이트 윈즐릿 분)는 바닷가에서 주운 화석과 기념품을 파는 누추한 화석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청년 로더릭(제임스 맥아들 분)이 고생물학 지식 전수를 하기 원한다며 찾아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약한 아내 샬럿(시얼샤 로넌 분)의 보호를 떠넘긴 채 길을 떠나버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리는 샬럿의 깊은 상처에 공감하고 그를 보듬는다. 그러다 결국 두사람의 호감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애정으로 발전한다.
메리 애닝(Mary Anning·1799~1847)은 실존했던 영국의 화석 수집가이자 고생물학자다. 쥐라기 해양생물의 화석을 최초로 발견해 고생물과 지질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다. 하지만 뛰어난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적 편견과 여성차별로 인해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암으로 4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후에야 재평가 받는다.
영화 <암모나이트>에는 메리 애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전통적인 전기물은 아니다. 실제로 제작 소식이 발표된 후 메리 애닝의 후손은 근거도 없이 그를 동성애자로 왜곡했다며 강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메리 애닝의 삶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거나 업적을 나열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작품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버거운 삶을 이어가던 한 인간이 뜻밖의 관계로 인해 잠시나마 선물받아 누리게 된 삶의 열정과 동력을 포착해내는 데 집중한다.
두 배우의 열연이 빚어낸 격정적 사랑
극 중 샬럿을 연기한 시얼샤 로넌은 “(영화를 본 후)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것이고, 나는 그게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걸 느꼈다’ 혹은 ‘그 장면에서 꼭 날 보는 것 같았다’고 말해줄 때 행복을 느낀다. 관객들이 <암모나이트>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극 중 두 인물이 겪는 여정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의 바람은 관객들이 작품이 담고자 했던 본질과 진심을 포착하는 데 요긴한 단서가 될 만하다.
케이트 윈즐릿과 시얼샤 로넌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의 캐스팅은 기획 단계부터 이 작품을 화제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미 각각의 작품 행보에 있어 밀도 있는 연기와 화려한 수상경력으로 뚜렷한 족적을 이어가고 있는 두사람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더구나 둘의 관계가 연인으로 설정됐다는 사실은 관계자들에게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힌다’는 행복한 우려를 자아내게 했다.
다행히 두사람의 협연은 평소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한 연기력과 개성을 재확인시키면서도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든다. 여기에 퀴어영화의 장르적 관습이라 할 수 있는 과감한 노출까지 마다치 않아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암모나이트>를 연출한 프랜시스 리 감독은 원래 연기를 전공했고, 배우로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해야겠다는 바람으로 연출로 선회했다. 몇편의 단편영화 작업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후 2017년 발표한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 <신의 나라>(God‘s Own Country) 역시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별과 시대를 초월하는 작가의 시선
영국 요크셔의 시골 목장에서 병든 아버지 대신 마지못해 거친 농장 일을 떠맡게 된 혈기왕성한 청년 조니(조시 오커너 분)는 루마니아 출신의 이주노동자 게오르게(알렉 세커리아누 분)에게 관심을 갖는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두사람은 주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거친 환경 속에서도 은밀한 사랑을 키워가지만, 정작 두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치명적인 위기는 내부에서 촉발된다.
표면적으로는 드세 보이지만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시선을 드러내는 멜로영화 <신의 나라>는 “요크셔 버전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라고도 비유되며 다수의 영화제에서 호평받으며 그해의 화제작으로 인정받았는데 날카로운 연출가로서 프랜시스 리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암모나이트>를 접하며 지난해 개봉한 프랑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표면적으로 소위 빅토리아 시대로 언급되는 유사한 시간적 배경이 이런 비교를 발현케 하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둘 다 최근 문화 전반에서 맹렬한 화두로 거론되는 ‘여성서사’란 범주 안에서 섬세하게 조율되는 드라마이며, 종국에는 다양한 감정이 공유되는 열린 결말을 선택한다는 특징도 유사점이다. 또 연출을 맡은 감독들 스스로가 성소수자라는 점도 특별하다. 현재 <암모나이트>의 미국 내 배급을 진행하고 있는 배급사 ‘네온(Neon)’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북미 배급사였다는 인연도 공교롭다.
이런 비교에 앞서 기억돼야 할 전제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그만큼 국내 다수의 관객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 태생의 여성 감독 셀린 시아마가 2019년 연출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프랑스의 브리타니 지역의 섬을 배경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 분)와 그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 분) 사이에서 싹트는 열정적 감정의 순간을 차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전 세계 20개 이상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제72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했고, 국내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개막작으로 소개되며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흥행의 성공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전까지 소개되지 못했던 감독의 전작 <톰보이>(2011), <워터 릴리스>(2007), <걸후드>(2014) 등이 뒤늦게 연이어 개봉하는 흔치 않은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