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만의 음악 같았던 트로트가 지금은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대중가요가 됐다. 주요 방송사는 트로트 전문 음악프로그램 편성을 대폭 늘렸다. 언젠가부터 나의 플레이리스트 한켠에도 트로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접하는 친근한 소재와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다. 익숙한 리듬과 듣기 쉬운 멜로디는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얼마 전까지 트로트 장르 특유의 멜로디와 리듬은 어른들 맞춤형 음악 같았다. 실제로 오랜 시간 장년층이 즐겨 찾는 음악이기도 했다. 그러나 트로트를 ‘성인가요’로 부르고, ‘어른들이나 듣는 음악’이란 고정관념으로 대할 시기는 이미 벗어났다. 요즘 트로트는 달라졌다. 트로트를 찾아 듣는 수요자의 폭이 넓어지고, 가수의 스타일도 다양해졌다. 트로트란 음악적 장르 안에서 표현 방식이 달라졌고, 팬층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느새 원조 트로트 가수 대열에 들어선 장윤정(1999)과 박현빈(2006)이 데뷔하던 때엔 젊은 감성과 외모를 갖춘 신인가수가 트로트 가수로 등장한 것만으로도 많은 화제가 됐다. 특히 박현빈의 경우 성악 전공자라는 독특한 이력이 한때 화제가 됐다. 통상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와 사뭇 다른 이들의 분위기와 면모만으로도 충분히 연예계에서 뉴스거리가 되던 때였다. 이제 아이돌 가수의 트로트 진출, 다재다능한 트로트 경연프로그램 우승 출신 등으로 트로트계는 한층 세련되고 젊어졌다. 한때 소위 ‘뽕짝’ 이미지가 짙었던 트로트는 요즘 시대적 감성의 매력을 담으면서 대중의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트로트, 요즘 감성을 가진 뉴트로가 되다
트로트는 한국인에게 향수와 같은 음악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힘들었던 그 시절 구구절절 삶의 애환을 담은 노래는 국민을 위로했다. 살아남기 위해 여유 따위는 즐길 수 없었던 삶의 고단함, 시대적 불안감과 슬픔 등 모든 삶의 애환을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고향에 대한 추억에 눈을 적시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현인의 ‘신라의 달밤’ 등이 그 시절 트로트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이후 찾아온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었던 많은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트로트의 오래전 모습이다.
지난해 기획한 클래식 공연에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와 ‘아리랑’을 연결해 하나의 관현악곡으로 담아낸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인 적이 있다. 원곡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클래시컬한 연주가 콘서트홀에 울려퍼지면 어느새 한국인 특유의 한을 담은 감성에 매료된 관객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안동지역에서 참여했던 클래식 콘서트에서는 지역 시민을 위한 깜짝 선물로 트로트 가요인 ‘안동역에서’의 오케스트라 버전을 관객과 공유한 경험이 있다. 전체적으로 원곡의 감성을 유지하며 가곡을 연상시킬 만한 클래시컬한 도입부를 담았다. 100인의 클래식 뮤지션으로 편성된 대규모 오케스트라단이 들려주는 ‘안동역에서’를 감상하는 관객의 반응은 흥겨움과 즐거움으로 넘쳤다. 지휘자가 프랑스 출신 클래식 지휘자라는 것도 재미의 한 요소였다. 트로트가 클래식 공연의 일부가 돼 관객에게 사랑받는 순간이었다. 해당 공연 영상이 오케스트라단의 공식 유튜브채널을 통해 공개된 후 한달이 채 되기 전 100만뷰를 달성했다. 음악팬의 뜨거운 반응은 다양한 감상평으로 쏟아졌다. 트로트가 결코 가볍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대중에게 전한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트로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요즘 트로트는 다양한 음악 장르와 결합해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김호중의 ‘바람남’이나 홍진영의 ‘사랑은 꽃잎처럼’같이 탱고를 품은 트로트는 세련된 자태를 뽐낸다. 요즘 트로트는 기존의 올드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장르적 한계도 넘어서고 있다. 가수 역시 트로트 가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리만큼 다양한 장르의 곡을 소화해낸다.
일상 속 심포니 연재 1편에서 다루었던 탱고, 재즈 등 소위 ‘네오클래식’ 혹은 ‘요즘 클래식’ 장르와 만나 음악적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런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클래식과 트로트의 만남’을 주제로 하는 정기공연을 선보이는 오페라단부터 바이올린, 첼로, 클래식 기타 등 클래식음악 전공자들의 트로트곡 커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요즘 트로트는 트로트 특유의 향수를 부르는 레트로 감성에 요즘 감성을 더한 ‘뉴트로’ 장르가 됐다.
트로트와 클래식의 제법 어울리는 만남
세기에 한 번 겪을 만한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하는 지금, 우리는 일상의 안위조차 불투명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요즘 더 옛 시절이 그리워진다. 함께 나눠 먹던 평범한 음식, 다 함께 모여 대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 우승을 응원하고 축제를 벌였던 그 시간이 그립다. 추억을 그리며 우리 맘을 달래고 견뎌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이란 붓을 들고 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아모르 파티’ 중) 지금 트로트는 우리 삶에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위로를 준다. 그래서 요즘 트로트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은 원래 클래식 성악가였다. 내가 기획했던 클래식 공연에서 개최 지역의 젊은 예술가로 참여했던 김호중과 오페라 ‘투란도트’ 중 ‘네순도르마’ 를 함께 한 적이 있다. 해당 공연 영상은 그가 인기 트로트 가수로 성장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트로트를 즐겨 찾는 팬층에 클래식음악을 경험하고 음악의 매력과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최근 트로트 가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그가 클래식 음반을 발매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접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트로트 애청자의 일상 속에 클래식음악을 전할 것이다.
트로트 가수가 들려주는 클래식음악이 있는가 하면, 클래식음악 가수의 끼와 감성을 담아 만든 트로트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근 사랑받는 크로스오버 사중창 그룹 ‘포레스텔라’가 전하는 ‘신라의 달밤’의 경우 클래식음악의 웅장함과 품격, 원곡의 애절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클래식에서 록 장르에 이르는 개성 있는 아티스트로 구성된 그룹 특성상 이들의 무대는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풍부한 감성을 품고 있다. 일렉기타와 관현악으로 편성해 클래식 감성을 담은 무대는 트로트와 요즘 클래식 사이의 묘한 어울림을 연출했다.
트로트는 이처럼 복합적인 예술성을 갖춰가고 있다. 탱고 느낌 가득한 연주곡부터 웅장한 풀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전하는 트로트 무대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음악이라야 트로트밖에 모르는 당신이라도 좋아하는 가수가 부른 클래식 감성의 커버 곡으로 새로운 느낌의 트로트 감상을 시작할 수 있다. 음악적 취향을 조금씩 넓힐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지나 김 코리안팝스오케스트라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