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운디네(Undine)
제작연도 2020
제작국 독일, 프랑스
상영시간 90분
장르 드라마, 멜로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
출연 폴라 비어, 프란츠 로고스키
개봉 2020년 12월 24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독일 국적의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는 철학과 연극을 전공했다. 다수의 TV영화 연출을 작업한 후 2000년 <내가 속한 나라>로 첫 극장영화 데뷔를 한다. 이후 현실적 소재를 영화 매체의 예술적 본질로 풀어내는 소위 ‘베를린 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지속적인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영화제를 제외하고 그의 작품이 공식적으로 한국 극장가를 통해 소개된 것은 2012년 작 <바바라>가 처음이다. 베를린에서 좌천당해 시골로 내몰린 소아과 의사 바바라는 사랑하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서독으로 탈출할 날만을 꿈꾼다. 정이라고는 붙일 수 없는 이곳에서의 짧은 도피는 그 일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변함없는 시선 속에 읽히는 새로운 시도
국내에는 지난해 7월 개봉한 2018년작 <트랜짓>은 아나 제거스의 소설 <수용소>를 원작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아직 나치가 점령하고 있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대체역사물이다. 독일군의 진군을 피해 파리를 탈출하려는 남자는 자신이 배달해야 할 편지의 주인공인 죽은 작가 행세를 하는데, 작가의 아내와 만나게 되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
<운디네>는 <트랜짓>에 출연했던 두 주연배우 폴라 비어와 프란츠 로고스키가 그대로 동반 출연한다. 제작진도 2편이 정서적으로는 일종의 연작 선상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엄밀히는 전혀 별개의 작품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역사학자로서 도시 주택 개발위원회의 프리랜서로 근무하고 있는 운디네(폴라 비어 분)는 최근 이별을 통보한 애인인 요하네스(야콥 마트슈엔츠 분)와 회사 앞 단골카페에 앉아 있다. 자리를 떠나며 그는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에게 최후통첩을 전한다. “나 일하러 가야 해. 30분 후, 쉬는 시간에 다시 올게. 여기서 기다렸다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떠나면 당신은 죽어.”
이 작품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운디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운디네는 고대인들이 우주의 기본 요소라고 믿었던 4원소(공기·물·불·흙) 중 물을 관장하는 정령으로 알려져 왔다.
<운디네>는 이전 펫졸드 감독의 작품과는 많은 부분에서 이질적이다. 일단 소재적으로 직간접적인 사회적·역사적 이슈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별과 새로운 사랑 사이에서 휘둘리는 한 여인의 감정만을 확대해 포착한다. 대신 영화는 몽환적인 판타지를 구현해내는 데 힘을 싣는다. 산업 잠수부인 크리스토프가 작업하는 강 속은 이를 극명하게 실현하는 공간이다. 댐으로 가로막혀 세상의 모든 것이 침잠된 듯 갇혀버린 어두운 세계는 매우 사적이며 만가지 감정이 응축된 정지된 시간의 장소다.
예술성과 오락성을 겸비한 서정적 멜로
이전 작품에서는 소극적으로 활용되었던 음악의 적극적인 활용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에 포함된다. 영화의 주제처럼 사용되는 바흐의 ‘솔로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3번 D단조’는 작품 전체의 쓸쓸한 분위기를 압도하고, 귀가 번쩍 뜨이는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의 삽입 역시 의외의 선곡으로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펫졸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참혹한 과거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도피를 꿈꾼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절박한 희망은 그들이 암울한 현재를 악착같이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하고 처절한 동력이 되지만, 결국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방아쇠는 ‘사랑’이라는 피할 수 없는 내면의 근원적 가치이다. 이런 일관된 주제를 벗어난 적이 없음에도 그의 작품은 늘 새롭다. 그리고 따뜻하다. 드라마라는 본질적 형식 안에서 그의 작품은 늘 다른 이야기를 펼치고 숙고를 통한 문법적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다각적 감정과 재미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펫볼드의 작품은 분명 작가주의 범주에 포함됨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대중 관객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영화적 매체가 지닌 예술적 기능성을 실현해내면서도 깊은 사색과 포용적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은 그와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자 가치이다. 더불어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꾸준한 창작을 이어나가는 저력 또한 대접받아 마땅하다. 감독의 이름이나 현대 독일영화가 낯선 관객들에게라면 또 다른 영화세계로 들어서는 입문작으로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영화 산업 초기에 독일은 강대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전반의 불안정과 빈곤의 혼란 속에 싹튼 창작가들의 혁신적 표현양식에서 비롯된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영유케 했다. 공교롭게 무성영화의 몰락과 때맞춰 도래한 나치의 출현은 꽤 오랜 기간 독일영화의 암흑기를 가져왔다.
1962년 새로운 부흥을 꿈꾸는 젊은 영화학도들에 의해 발표된 ‘오버하우젠 선언’은 독일영화의 부활을 가져왔고, ‘뉴 저먼 시네마’로 명명되는 제2의 전성기를 꽃피운다.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폴커 슐렌도로프 등은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대다수 독일 감독의 이름이 당시와 맞물려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까지도 왕성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거나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 영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뉴 저먼 시네마의 화려한 영광도 80년대 들어서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저조한 자국영화 소비율과 미국문화 추종주의는 산업 자체를 와해시켰고, 결국 능력 있는 작가들 상당수는 열악해진 제작환경을 피해 외국으로 떠났다.
이후 침체기를 겪던 독일영화계는 통일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된다. 한 축으로는 독일 출신으로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세계시장에 진출해 활약하는 인물들의 일조가 있었고, 다른 축으로는 소위 ‘베를린 학파’의 대두가 목격된 것이다.
베를린 학파는 중산층의 심리나 역사적 고찰 같은 현실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영상미학을 접목하며 영화 매체의 본질을 추구하는 감독군을 일컫는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개별적인 작업에 충실하지만 큰 틀에서는 정적이고 미니멀리즘의 유사한 영상미학을 공유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베를린 학파란 호사스러운 비평계가 만들어낸 실체 없는 담론의 집합 대명사일 뿐이라는 일각의 비판적 평가도 있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