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라져버린(The Vanished)
제작연도 2020년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14분
장르 액션, 공포, 스릴러
감독 피터 파시넬리
출연 앤 헤이시, 토마스 제인, 제이슨 패트릭
개봉 2021년 1월 1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용감한 선택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사라져버린>이라니. 직역투의 영화제목 번역이 사라진 게 1980년대 후반 정도였던가. 저런 경우 그냥 영어제목 그대로 배니시드(The Vanished)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짓는 게 일반적인데. 보통 이런 경우 과거에 동일명의 영화가 있는 경우다. 찾아보니 2011년도에 나온 <배니쉬드>라는 영화가 있다.
사라져버린 건 딸이었다. 테일러라는 이름의 열 살짜리 꼬마. 캠핑카를 타고 오클라호마 오지 캠핑에 나선 부부. 아빠는 딸을 데리고 낚시를 할 참이었다. 숙박요금을 결제하고 난 엄마는 기르던 강아지만 남겨놓고 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납치된 걸까. 납치되었다면 범인은 누구일까. 캠핑카를 타고 온 이웃의 불임부부? 캠핑장 청소를 하며 할일 없이 살아가는 마약중독 젊은 청년? 아니면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캠핑장 주인(이 주인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란, 그의 소아성애 취미였다)? 부부의 신고를 받은 보안관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마침 교도소 탈주범이 인근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정보다. 30년 베테랑 경력의 이 보안관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미아 발생 사건은 하나도 없었다며 부부를 안심시키는데 실은 마약에 절어 실종된 자기의 아들 사건은 해결하지 못했다.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요컨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결손된 존재다. 결손에서 오는 상실감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이내 헛수고가 되고 만다. 보안관은 자신이 해결하지 못했던 아들 사건을 떠올리며 FBI에 사건을 넘기지 않고 자신이 해결하려 한다. 수색작업이 못 미더운 부부는 직접 수색에 나선다. 숲속에서 웃통을 벗고 자는 한 남자와 조우하고, 이 남자가 자신의 딸을 납치해 인질로 잡고 있는 탈옥수라고 생각한 부부는 실수로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연달아 벌어지는 살인사건과 실종. 사라진 것은 이들 부부의 딸만이 아니었다. 의심은 꼬리를 물고, 호의는 적의로 돌아온다.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의 늪 같은 데 함께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다.
영화엔 반전이 있다. 이건 반칙이 아닌가, 생각하며 영화를 다 본 다음 다시 처음 부분을 돌려봤다(코로나19 덕분인지, 스크리너를 제공받는 온라인 시사 방식이었다). 주의 깊게 프레임은 분리되어 있다. 부부 캐릭터가 한 프레임에 잡힌 경우는 꽤 되지만, 딸 테일러가 부부와 함께 잡힌 프레임은 없다. 딸은 그들이 기르고 있는 강아지를 안고 노래를 부른다. 반칙이라면 반칙이다. 환상과 실재, 비디오로 찍힌 과거 영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는 구분 지어져 있지 않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짧게 누군가 쫓기는 남자가 편집되어 있는데 의도적으로 이 남자의 외모는 검은 실루엣 외에는 노출되지 않는다. 이 남자로 추정되는 영상은 한 번 더 편집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희생자의 시선으로 이 남자가 피 묻은 칼을 들이대는 모습이다. 테일러의 실종과 이 남자의 행위가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암시다. 후반의 반전을 받아들인다면 굳이 이런 장면을 찍고 편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화면 밖 전개 스토리로 내버려 둬도 무방한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군더더기가 없지 않았다.
전자미디어 시대에 사라짐의 의미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가 담고 있는 전반적인 정서는 우울함 내지는 쫘악 가라앉은 느낌이다. 딸 테일러는 영화상영시간 10분 만에 이야기에서 사라졌다가 아버지가 꾸는 악몽에서 잠시 등장한다.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것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한 독립영화다. 감독은 반려동물에 과도하게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떤 공통점을 발견한다. 외로움과 고독, 신산한 삶이다. 영화에서 반전의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는 것은 역시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뉴욕 무역센터건물 사진이다.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형식을 취했지만, 단지 인간의 기억만이 아닌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는 전자미디어의 시대에 존재의 사라짐(vanished)의 의미가 무엇인지 반추하는 영화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으로 사망한 사람들, 관습과 문화들, 돌이켜보니 벨 에포크였던 자유로운 세계여행이 가능했던 2019년 이전의 세계에 대해 감독이 바치는 진혼곡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의 엔딩장면엔 희뿌연 안개 속에 우뚝 서 있는 건물을 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이제는 사라진 건물이다. 뮌헨올림픽 때 벌어진 테러사건-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벌이다가 인질 전원이 사망한 비극이다. 스필버그 감독이 그 엔딩장면에 담고자 했던 것은 1976년의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성찰 부족이 25년 뒤의 비극을 잉태했다는 주장이리라.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 자리엔 9·11 메모리얼 뮤지엄이 세워졌다. 몇년 전 출장길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의 비극을 여러 각도에서 반추하는 전시물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건물이 지어진 1973년 이래 2001년 무너질 때까지 건물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클립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1998)에서는 유성우가 쏟아져 뉴욕이 쑥대밭이 되는데, 세계무역센터 건물도 윗부분이 부서지는 장면이 나온다.
9·11 메모리얼 뮤지엄에 방문하면서 주의 깊게 봤던 것은 사건의 비극적 감상만이 아닌 왜 테러리즘이 벌어졌는지, 테러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알카에다와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했음에도 왜 극단주의는 근절되지 않는지에 대한 반성을 전시물이 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한 음모론이 과거까지 음모론의 제왕을 차지하고 있던 달착륙이나 케네디 암살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을 제치게 된 까닭에 대해서도 충분한 주의를 돌리고 있는지의 문제다. 중동 테러리즘의 발흥이나 역사에 대한 전시나 9·11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음모론자(9·11 Truther)의 주장 같은 건 전시장 맨 끝에 각각 한칸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글쎄, 그 정도 공간을 할당하면 충분히 그 이야기들을 커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