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트라이커가 없다” 정조국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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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국(36)은 축구선수로 공식 은퇴를 선언한 12월 9일 취재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도 좀체 발을 떼지 못했다. 눈앞에선 정조국이 18년간 그라운드를 누볐던 과거 장면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프로축구 K리그에서 기록한 득점만 역대 5번째에 달하는 121골.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만들면 꽤 괜찮은 공격수”라고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아름다운 골 폭죽의 향연이었다. 정조국의 마지막은 K리그에서 국내 골잡이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과 맞물려 깊은 아쉬움을 남겼다.

정조국이 12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가족 이야기를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정조국이 12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가족 이야기를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축구는 다소 투박하지만 골문을 꿰뚫는 결정력에선 아시아 최강을 자부했다. 차범근(67)으로 시작해 최순호(58)와 황선홍(52), 최용수(47), 이동국(41)으로 이어지는 골잡이 계보는 축구팬이라면 줄줄 뀄다. 미사일처럼 빠른 슈팅을 자랑해 ‘패트리어트’라는 애칭을 얻은 정조국도 그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선수 중의 하나였다.

국내 골잡이 실종시대

그런데 최근 K리그에선 굵직한 골잡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정조국이 2016년 1부리그인 K리그1에서 득점왕(20골)에 오른 이래 한국 골잡이의 입지가 크게 줄었다. 실제로 지난 4년간 득점 순위 톱5에서 경쟁력을 보여준 것은 2017년 득점 2위였던 양동현(34·19골)과 4위 주민규(30·17골), 2018년 득점 5위 문선민(28·14골) 뿐이다. 정조국은 “득점 순위에 한국 출신의 간판 스트라이커가 없다”고 탄식했다.

K리그1에서 제공권과 몸싸움, 골 결정력을 겸비한 국내 골잡이가 사라진 것이 하루 이틀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자리는 외국인 선수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올해 K리그1 12개 구단에서 간판 골잡이가 한국 선수인 구단은 군팀인 상주(오세훈·4골)를 포함해 5개팀에 불과하다. 강원FC(고무열·9골)와 FC서울(박주영·4골), 성남FC(나상호·7골), 부산 아이파크(이정협·6골) 등의 성적표를 살펴보면 국내 골잡이들의 미래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다.

국내 골잡이 실종시대가 열린 것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먼저 2013년 K리그에 승강제가 도입돼 성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는 눈앞의 성적이 우선돼 외국인 공격수에 의존도가 높아졌다. 자연스레 육성을 위해 한국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짧아지고, 재능있는 유망주들은 다른 포지션을 찾아가는 일이 많다. 미드필더와 수비수에서 굵직한 유망주가 나타나는 비중이 높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김대길 경향신문 해설위원은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감독들이 외국인 선수와 자국 공격수를 함께 출전시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례가 종종 나온다. K리그도 한국 골잡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골잡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자신만의 무기를 잊은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선수는 많은데 정작 자신의 색깔을 찾아보기 힘들다 보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정조국은 “나라고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하지 않았겠냐. 내가 살아남은 비결은 다른 선수를 닮으려 노력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수마다 갖고 있는 역량이 다르다. 누구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유벤투스)나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가 될 수는 없다. 특징이 있는 선수가 잘 안 보인다. 큰 무기를 하나씩 가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정조국이 지난 11월 30일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하나원큐 K리그2 대상시상식 2020에서 공로상을 받고 나서 현역 은퇴 결정을 밝혔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정조국이 지난 11월 30일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하나원큐 K리그2 대상시상식 2020에서 공로상을 받고 나서 현역 은퇴 결정을 밝혔다.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냉정하게 말하면 정조국도 장점만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골 냄새를 맡는 능력이 뛰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게 본인의 고백이자 조언이다. 정조국은 “내가 빠른 선수였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기술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헤딩도 뛰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골대 앞에서의 슈팅은 자신이 있었다. 외국인 선수들과 부딪치면서 자신의 장점을 깨달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앞서 은퇴한 이동국도 자신의 색깔을 살려야 한다는 면에선 의견이 같았다. 이동국은 “경쟁에서 이기려면 자기만의 특별한 장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극대화해야 한다”면서 “단점을 보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선수들이 못 따라올 정도로 장점을 키운다면 오래도록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골잡이 미래는 있다

한국 축구의 미래가 어둡지 않은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안겨주는 선수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오세훈(21·상주)과 조규성(22·전북) 등 젊은 골잡이들이 정조국과 이동국의 뒤를 이을 주자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점이 강점이다.

오세훈은 큰 키(1m93)를 살린 포스트 플레이에 능해 수비수를 괴롭힌다. 왼발에서 터져 나오는 강력한 슛도 좋다. 지난해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결승행을 이끌면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K리그2와 K리그1에서 꾸준히 뛰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조규성은 미드필더 출신으로 풍부한 활동량이 무기다. 최전방에서 꾸준히 뛰어다니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한편 골까지 책임진다. 조규성은 지난해 2부리그인 FC안양에서 데뷔해 14골로 득점 3위에 올랐고, 올해 전북 현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이동국의 노하우를 배우는 데 주력했다. K리그1 득점 기록은 4골에 그쳤지만, 최종전에서 2골로 우승에 힘을 보탰을 정도로 앞으로의 미래는 밝다.

오세훈과 조규성이 골잡이 계보를 잇는 선수로 성장하려면 내년 한국 축구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다. 오세훈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군팀인 상주에 입단해 충분한 경험을 쌓았지만, 내년 6월 제대 이후 외국인 선수들과 어떤 경쟁을 펼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오세훈이 돌아가야 하는 울산 현대는 올해 득점왕(26골)인 주니오가 버티고 있다. 조규성이 뛰는 전북도 브라질 출신 구스타보로 부족해 또 다른 외국인 공격수를 데려올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두 선수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지가 한국 축구의 숙제가 됐다.

<황민국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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