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조제(Josee)
제작연도 2020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17분
장르 로맨스, 멜로
감독 김종관
출연 한지민, 남주혁
개봉 2020년 12월 10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이미 혁혁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정받은 장점을 뛰어넘겠다는 의욕 자체가 뒤처진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경주와 다름없다. 많은 골수팬을 확보하고 있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더더욱 쉽게 건드릴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일본문화 특유의 냉소와 건조한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빚어낸 독특한 사랑 이야기는 단순히 문화의 차이를 떠나 쉽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과 평범한 사람, 경제적으로는 가질 수 없는 사람과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사이의 연애 이야기이며, 낭만보다는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시선이 지배적인 로맨스 이야기다. 그래서 리메이크 소식이 들리자 주변에는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대학 졸업반으로 취업 준비 중인 영석(남주혁 분)은 길을 가다 골목 귀퉁이에 쓰러져 있는 조제(한지민 분)를 발견하고 다리가 불편한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누추한 집에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와 살고 있는 조제에게서 서글픔과 외로움을 엿본 영석은 그날 이후 그의 낯선 존재감을 쉽게 지워내지 못한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생에 있어 가장 눈부실 시절의 잊지 못할 시간으로 이어진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의 사이
배포된 보도자료는 감독의 소회로 시작한다. 요약하면 “주변 지인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다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원작이 가지고 있던 매력은 늘 나의 작품에 담고 싶은 것들이었다. 가치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개성을 드러낼 때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는 좋은 창작이 될 것을 믿었다. 극 중 조제가 그러했듯 나 또한 버려지거나 외로워진 세계에 빛과 아름다움을 찾아주고자 했다.” 이런 그의 각오와 고백은 거짓이 아니었음을 영화 <조제>는 증명하고 있다.
주변 인물들이 새롭게 정리되고 주요인물들의 환경에도 변화가 주어지면서 두 주인공 사이의 감정은 훨씬 증폭되었다. 앞선 영화가 여백을 통해 관객 스스로가 인물들의 내면을 상상하도록 유도했다면 이번 영화는 훨씬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관계를 드러내고 뒤쫓는다. 또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했던 그들만의 세상 역시 생명력이 넘치는 현실의 무대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원작소설 때부터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던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유대 안에 젖어드는 두려움이라는 정서는 고스란히 유지된다. 주제를 벗어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자칫 과도한 신파로 넘칠 수도 있었을 감정의 수위조절 역시 얄미울 정도로 탁월하다.
연출을 맡은 김종관은 독립영화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인물로 일각에서는 ‘멜로의 장인’으로 통해왔다.
더딘 행보 끝에 만개한 장인의 멜로
이미 꾸준한 단편들로 주목받아왔는데 2004년 감독, 각본, 촬영, 편집, 미술에까지 이름을 올리며 완성한 6분짜리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기대할 만한 감독으로 주목받았다. 이 작품은 그해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 외 다수 수상을 하고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인기를 얻었는데, 근래에는 배우 정유미의 데뷔작으로도 자주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인간 내면의 다양한 감정을 포착해내는 날카로운 시선은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 장치이자 따뜻한 정서로 공유되는 구심점이기도 하다.
단편과 장편을 오가는 꾸준한 작품 활동은 멜로, 드라마 장르 안에서만 일관되게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지지자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유보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눈에 띄는 작품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또 서정적이고 섬세한 작품세계를 추구하지만 이미 많이 보아왔던 것들 이상의 성취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재능을 확신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번 작품 <조제>는 그동안의 기다림과 아쉬움을 단번에 해소하고도 남을 만한 결과물로 보인다. 더불어 더 많은 대중에게 그의 진가를 선보일 수 있는 계기로서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영화의 원작이 된것은 일본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가 1985년 발표한 단편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다. 2003년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우에노 주리 등을 주연으로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해 영화화했다. 원작소설에서는 행복했던 두 사람의 찬란한 순간에 집중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되지만, 영화는 그 이후의 상황까지 그려낸다.
애초 모태가 된 소설 자체가 짧은 단편이었으니 이야기를 확장해 완성된 장편영화는 원작의 존재를 전혀 새로운 가치로 부활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성공은 감독을 비롯한 출연 배우들을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았고, 원작소설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이 스스로를 조제로 부르는 계기가 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들까지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한국에는 2004년 7월 개최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영화제에서 먼저 본 관객들의 긍정적 호응을 포착한 수입사는 여세를 몰아 석달 후 제목을 살짝 수정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정식개봉을 했는데 장기상영을 이어가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즈음에 발맞춰 뒤늦게나마 원작소설도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음악도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한국팬들의 호응과 애정은 더욱 두터운데 10주 장기상영이라는 기록은 당시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였고, 2016년 봄에는 재개봉도 이루어졌다. 올 12월에도 소규모 기획전의 형태이나마 또 한 번의 스크린 재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2017년에는 동명의 연극으로 만들어져 대학로 무대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내년 1월에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조제>를 만날 수 있다. 10월 개최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상영되기도 한 이 작품은 <카우보이 비밥>, <강철의 연금술사> 등의 히트작을 선보여온 스튜디오 본즈가 제작을 맡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