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에서 공식적으로 지명타자가 쓰인 것은 1973년부터다. 그해 1월 아메리칸리그 구단주들이 지명타자 제도 도입 여부를 두고 투표를 한 결과 8 대 4로 가결됐다. 지명타자 제도 도입은 지나치게 ‘투고타저’였던 리그 환경 때문이었다. 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해야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메리칸리그가 먼저 도입했다. 1973년 4월 7일 뉴욕 양키스의 론 블룸버그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지명타자로 뛰었다.

LA다저스 시절 타석에 들어선 류현진(현 토론토 블루제이스). / AP연합뉴스
제도 도입 초기, 수비에 나서지 않는 지명타자는 환영받지 못했다. 공격만 하는 ‘반쪽’ 선수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타석에 들어섰을 때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다. 수비를 하지 않고, 타격만 하는 선수는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다. 아메리칸리그는 지명타자 제도를 유지했지만, 내셔널리그는 끝까지 ‘전통’을 고수했다.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야 야구’라는 고집 때문이다.
올 시즌 ‘시험 사용’ 성공적
에드가 마르티네스는 시애틀의 전설적인 타자다. 공격력으로는 메이저리그 역대 타자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309홈런, 2루타 514개, 통산 OPS가 0.933이나 된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마무리로 꼽히는 마리아노 리베라는 “위기 순간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타자”로 마르티네스를 꼽았다.
역대 최고의 타자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쉽지 않았다. 후보 자격 마지막 해였던 2019년 1월, 10수만에 간신히 85.4%의 지지를 얻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마르티네스가 18시즌 대부분을 지명타자로만 뛰었기 때문에 ‘반쪽 선수’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마르티네스는 투표를 통해 뽑힌 첫 지명타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다. 마르티네스는 “지명타자도 팀 승리에 도움이 되는 자리다. 마치 마무리 투수처럼”이라고 말했다.
전통과 고집이 바뀔 가능성이 열렸다. 메이저리그는 양대리그 모두 지명타자 제도 도입을 논의 중이다. 코로나19 때문에 60경기만 미니 시즌으로 치른 2020시즌, 내셔널리그에 임시로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됐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수들의 체력 관리와 부상 방지를 위해 지명타자를 인정했다. 내셔널리그 투수들은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서지 않아도 됐다.
‘시험 사용’은 성공적이었다.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고, 구단과 선수 양쪽의 환영을 받았다. 메이저리그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2021시즌부터 양대리그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30개 구단의 투표가 있어야 하는데, 디 어슬레틱의 짐 보우든은 “적어도 25장의 찬성표를 얻을 것 같다”고 전했다.
구단들은 당연히 찬성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몸값은 치솟고 있다. 특히 쓸 만한 선발투수는 여전히 부족해 비쌀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구단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2020시즌 스토브리그 FA 선발투수들은 나쁘지 않은 가격에 계약을 하고 있다. 내셔널리그 구단 입장에서는 비싼 투수들을 부상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지명타자 도입이 반가운 일이다.
메이저리그는 MLB 커미셔너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선수노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토니 클라크 선수노조위원장도 내셔널리그 지명타자 도입을 위한 선수 투표를 받을 계획이다. 투표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선수들 입장에서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내셔널리그 15개팀 1명씩만 생각해도 새로운 타자 자리가 15개 생기는 일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는 일을 노조가 반대할 리 없다.
메이저리그의 지명타자 도입은 구단과 선수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처럼 보이지만, 게임의 룰이 바뀌는 것은 게임 자체의 성격과 스타일을 바꿀 수 있다. 게임으로 치자면, 패치를 통한 규칙과 캐릭터 능력치가 바뀌면 전술과 전략이 바뀜으로써 게임의 색깔이 달라진다. 이때 능력치를 높이는 것을 버프, 낮추는 것을 너프라고 한다.
야구 보는 재미 방향 달라져
지명타자 제도 도입은 공격력을 높이는 ‘버프’로 보이고, 이는 리그 흥행을 위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대신 나비효과가 존재한다. 수비는 약하지만 타격이 강한 선수들에게는 ‘기회’가 열린다. 구단들은 지명타자 자리를 위해 타격에 특화된 선수를 기용할 인센티브가 생긴다. 아메리칸리그 구단들 입장에서는 기존 지명타자들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이들의 몸값이 올라가는 고민이 생길 수 있다.
투수들의 가치도 달라진다. 한때 잘 치는 투수들은 공격력에서 플러스 요인이 있었지만, 지명타자 제도 도입은 투수의 타격 능력을 ‘쓸모없는 가치’로 만든다. 류현진의 홈런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장면이 됐다. ‘이도류’라 불리던 투타겸업으로 화제를 모았던 오타니 쇼헤이(LA에인절스)의 가치도 예전 같지 않다. 둘 중 하나만 잘하는 게 팀 입장에서는 더 유리하다.
더 큰 문제는 ‘포수’ 포지션에서 생긴다. 내셔널리그의 경기 운영 전략의 기본은 경기 중반, 투수 자리에 어떻게 대타를 쓰느냐였다. 경기 흐름에 따라 선발투수를 빼고, 그 자리에 대타를 넣는 머리싸움이 치열했다. 내셔널리그에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되면 투수의 타석 기회가 없다. 대타 작전의 묘미가 줄어든다.
팬그래프닷컴은 ‘일반적으로 타격이 가장 약한 포수 포지션에 불똥이 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비가 강조되는 포수는 일반적으로 타격 실력이 떨어진다. 감독 입장에서는 포수 타석이 돌아올 때마다 대타를 쓰는 것이 팀 득점 가능성을 높인다. 데이터를 활용한 전력 분석이 심화되면서 포수의 볼 배합과 경기 운영 능력의 가치도 예전만 못하다. 공을 잘 잡고, 블로킹을 잘하기만 하면 되는 ‘값싼 포수’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로스터에 값싼 포수 3명을 두고, 돌려쓰면서 대타 작전을 활용하는 방식이 팀 득점력을 높인다는 계산이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NC 전력의 상당 부분은 포수 양의지의 경기 운영 능력에서 나왔다는 평가가 많다.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의 지명타자 도입은 ‘합리성’과 ‘효율성’ 차원에서 포수라는 포지션의 가치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지명타자 도입이 명포수의 멸종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규칙의 변화는 변화에 따른 사이드 이펙트(부작용)를 낳는다. 규칙 변화는 부작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 속에 이뤄져야 한다. 지명타자 제도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야구 보는 재미를 바꿀지도 모른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