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의 반란’ 이끄는 맏형·맏언니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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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남녀프로농구는 인천 연고팀의 반란으로 관심이 높다. 시즌 전 하위권으로 분류된 남자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와 여자프로농구의 인천 신한은행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모두가 예상치 않았던 질주. 전자랜드와 신한은행은 주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간다. 중심에는 ‘고참’이 있다. 전자랜드의 최고참 정영삼(36)과 신한은행의 맏언니 한채진(36)은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았지만 뜨거운 불꽃을 태우고 있다.

인천 신한은행 한채진(왼쪽)과 인천 전자랜드 정영삼(오른쪽). / 연합뉴스·박민규 기자

인천 신한은행 한채진(왼쪽)과 인천 전자랜드 정영삼(오른쪽). / 연합뉴스·박민규 기자

정영삼 “전자랜드는 집 같은 곳” 모기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팀 운영을 포기하기로 하면서 전자랜드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KBL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팬들의 응원은 그 어느 때보다 높고, 선수들의 의지도 뜨겁다. 자칫 선수단에 퍼질 수 있는 불안함을 잡아주는 것이 지금 정영삼이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이다. 정영삼은 “우리 팀 전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데도 잘해서 나 역시 좀 의아한 부분이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나머지 팀들이 부상 같은 변수가 있고, 초반 준비하는 과정에서 준비가 덜 된 것 같다”며 껄껄 웃었다.

정영삼은 전자랜드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2007년 KBL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4순위 지명을 받은 뒤 13년째 전자랜드에서만 활약하고 있다. 2007년은 소위 ‘황금 세대’로 불리는 걸출한 선수들이 대거 등장한 해로 양희종(KGC), 함지훈(현대모비스), 김태술(DB) 등의 선수가 아직도 코트를 누빈다.

정영삼은 몇 년 전부터 주전보다 벤치에서 시작하는 날들이 부쩍 늘어났다. 김낙현, 이대헌 같은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정영삼은 이제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났다. 마지막 시즌을 맞는 전자랜드에서, 정영삼은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도록 ‘맏형’의 역할을 도맡는다. 정영삼은 “되도록 (마지막이라는 것은)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한다. 구단이 운영을 마지막으로 한다는 것이지, 후배들의 선수생활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라며 “끝이 있으면 새로운 시작이 있다. 마지막이지만, 팀을 위해 선수들의 마음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있다”고 했다.

애착을 가진 팀이 없어진다는 것에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다. 정영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후배들이 정영삼은 너무도 고맙기만 하다. 그는 “맏형인데 팀 사정이 이러니 분위기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후배들이 내가 걱정되지 않게 훈련이든 경기든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인다. 김낙현이나 이대헌 같은 경우 원래 조용한 스타일인데 자신들이 나서서 직접 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 내가 뭘 더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영삼은 전자랜드를 ‘집’에 비유한다. 그는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살다 보면 집에 들어갈 때 행복한 느낌이 들지 않나. 전자랜드가 바로 그렇다. 삼산월드체육관에 출근해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신발끈을 묶고 준비하는 과정이 나한테는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채진 “신한은행, 이번 시즌 만만하지 않을 것” 베스트 5의 평균 연령이 31.8세로 여자프로농구 6개 구단 최고령인 신한은행을 이끄는 수장은 한채진이다. 2003년 처음으로 프로에 데뷔한 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지금은 WKBL 최고령 선수가 됐다. 여전히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경쟁력을 과시하며 코트를 누빈다. 평균 38분을 상회하는 출전시간이 말해주듯, 몸관리 하나만으로도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레전드’다.

사람들은 한채진을 ‘철의 여인’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한채진의 체력이 타고났다고 얘기한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채진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한채진은 “몸관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다. 몇 년 동안 루틴을 만들어가며 관리를 했다. 게임을 뛸 때 맞는 체중, 수면시간 등 다 계산하며 관리한다”고 말했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단, 남들처럼 보양식을 철저하게 챙겨먹지는 않는다. 한채진은 “팬들이 콜라겐이나 홍삼을 많이 사주는데, 정작 보양식보다는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는 편이다. 요즘은 막창이 당긴다. 또 닭발도 즐겨먹는 편”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2003년 신인드래프트 전체 5순위로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현 신한은행)에 입단한 한채진은 2008년 구리 KDB생명(현 BNK)으로 이적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KDB생명으로 이적한 시기는 한채진이 농구선수 시작과 함께 정해놓은 ‘은퇴 마지노선’이었다. 한채진은 “원래 스물일곱 살 때 그만두고 결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부터 전성기가 시작됐고, 은퇴 결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정신없이 선수생활을 하다가 서른세 살에 은퇴하자고 다시 마음먹었는데, 또 놓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으로의 이적도 고민이 많았다. 은퇴와 선수생활 연장의 갈림길에서, 그를 이끌어준 것은 후배 김단비였다. 한채진은 “김단비 하면 신한은행을 대표하는 슈퍼스타다. 자기보다 선배가 팀에 온다면 누가 좋아하겠나. 하지만 단비가 먼저 나한테 전화를 해서 같이 뛰자고 설득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그 배려가 지금까지도 너무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한채진과 이경은(33), 김수연(34), 김단비(30) 등 30대 선수들이 주축으로 뛰고 있지만, 이들의 힘으로 신한은행은 약체라는 평가를 딛고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채진은 “우리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웃음 섞인 농담을 던진 뒤 “우리가 꼴찌 후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시즌 시작해보면 알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즌 시작을 기다렸다”며 “이번 시즌 첫 경기를 부천 하나원큐와 했는데, 그 경기부터 꼭 이기고 싶었다. 그 첫 단추를 잘 끼워서 좋은 흐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지금의 기세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현재 그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한채진도 이번 시즌 신한은행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는 “우리가 이번 시즌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수연이가 부상으로 빠져 높이가 낮아지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큰 문제는 없고 외곽부대도 건재하다”며 “연습할 때 한 것만 경기에서 발휘할 수 있다면, 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윤은용 스포츠부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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