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죽던 날(The Day I Died: Unclosed Case)
제작연도 2020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16분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감독 박지완
출연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김선영, 이상엽, 문정희
개봉 2020년 11월 12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철저히 짓밟힌 결혼생활과 지난한 이혼소송, 거기에 심각한 사고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실의에 빠져 있던 형사 현수(김혜수 분)는 심기일전해 복직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 날 현수에겐 작은 섬에서 유서를 남기고 실종된 소녀 세진(노정의 분)의 자살사건을 종결지으란 업무가 떨어지고 섬으로 향한다. 소녀가 머물던 집과 이웃을 탐문하던 현수는 비밀스러운 인물 순천댁(이정은 분)을 만나면서 실마리를 찾게 되고 숨겨진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필자의 눈에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감독들의 득세가 뚜렷한 하나의 ‘현상’으로 읽힌다. 따지고 보면 과거로부터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 단순히 성별을 떠나 경쟁력 있는 기획이 공정한 평가를 거쳐 어려움을 뚫고 영화화되는 당연한 과정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구촌 각지에서 뜨거운 이슈로 논란이 되고 있는 ‘도덕적 올바름’이란 이름의 시대적 조류와는 철저히 무관한 것이라고 감히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또 그 연장선상에서 과거 조폭영화나 공포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대세에 편승한 시장 전략이라고 보는 것은 근시안적 모함일까?
이 영화는 이런 의심의 끝단에서 행여나 보게 될까봐 염려했던 우려를 고스란히 펼쳐놓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장르적 만족도가 낮다. 애초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죽음이라는 전제부터가 결말을 예상케 하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 거치는 과정 또한 매우 지루할 뿐 아니라 도식적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장르로만 재단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여성영화를 향한 우려와 한계
영화는 관객들에게 시종일관 매우 사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논제만을 공격적으로 강요한다. 사회에서 차별받고 피해받는 여성들은 결국 그들만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괴이한 이상주의다.
영화 속에 소극적으로 등장하는 소수의 남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위협적이고, 야비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다. 영화는 애초부터 작정했다는 듯 초지일관 그들의 무가치를 지겹도록 나열하고, 남성 존재 자체를 거세해버리려는 듯 안간힘을 쓴다. 역설적이게도 주인공 현수가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교류하는 두 부류의 여성 캐릭터들조차 이를 분명하게 반증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한쪽은 무지하거나 연약해 사회의 폭력과 차별에 대항하는 것을 포기한 인물들이다. 소녀 세진은 무능력한 아버지, 사악한 오빠가 뿌린 죗값을 대신 치르기라도 하듯 섬에 유배된다. 그곳에서 행정적 도우미를 자처하는 형사마저 결국 그를 무책임하게 팽개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란 유서를 쓰는 것이다. 모든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순천댁 역시 무리한 결단을 통해 작은 희망의 빛을 찾지만, 이 역시 결국엔 스스로 구원은 포기하는 ‘자기희생’이라는 관념적 미덕을 재현하는 행위일 뿐이다.
누구와 무엇을 위한 이해와 포용인가?
다른 한쪽은 주변의 남성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극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지위를 이용해 사익을 챙기거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 대상을 안일하게 이해하는 파렴치한으로 묘사된다.
결국 영화는 순수한 소수 여성의 연대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완성해낸다. 결말이 꿈꾸는 이상적 세계란 다양한 현실적 논의와 가능성을 애초부터 철저히 부정하는 말 그대로 이상향일 뿐이다. 문제는 그곳이 매우 편협하고 관념적이며 겉멋만 가득한 세계라는 점이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그 쉽지 않은 기회를 낭비하는 것은 매우 우매한 행위이기에 기회를 잡은 대부분 사람들은 혼신을 다해 진심을 담는다. 그 진심이란 심오한 철학일 수도 재미일 수도 있지만 결과물로 확인된다. 다른 변명의 여지는 없다. 과연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진심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이 이기적이고 흉측한 피해망상적 적의(敵意)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적어도 이야기를 쓰고 연출한 사람만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충분히 짐작되기도 하지만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올여름 베를린영화제는 내년 시상식부터 기존의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구분하지 않고 ‘주연상’ 하나로 통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조연상 역시 마찬가지다. 성차별과 성인지 감수성 부족 문제를 지양하는 소위 젠더 중립성을 존중한다는 취지의 결단이다. 더불어 조직위는 고위층 남녀 동수 구성 등도 약속하며 성 평등 증진을 약속했다.
9월에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2025년부터 적용될 오스카 작품상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고 알렸다. 그 내용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와 스태프를 포함한 참여인원 전반 및 내용과 주제에 있어서 소수 유색인종, 여성, 성적소수자 등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중시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소위 PC(Political Correctness)로도 불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쉽게 정의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무리가 있더라도 단순 정의화 해보자면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언어와 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회운동의 경향’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모든 이가 차별 없는 동등하게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박애주의적 시작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이득과 편의를 위해 왜곡된 적용과 억지주장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나 기분에 따라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말 그대로 ‘정치적’ 목적의 강요와 이해가 대립하면서 처음의 선한 의도는 변질되어 혼란을 주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빈번해졌고, 급기야 역차별 논란까지 불거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힙한 세대라 자칭하는 몇몇 부류들 사이에서 이런 근본 없는 외양적 PC가 자신을 과시하는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무책임하게 대두되며 유행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