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글로리아를 위하여(Gloria Mundi)
제작연도 2019
제작국 프랑스
상영시간 107분
장르 드라마
감독 로베르 게디기앙
출연 아리안 아스카리드, 장 피에르 다루생, 제라드 메이란, 아나이스 드무스티에
개봉 2020년 10월 29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한 아기의 출산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아기의 이름은 영광을 뜻하는 ‘글로리아’. 참으로 흔하지만 간절한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하지만 적잖은 나이임에도 옷가게 수습사원을 전전하고 있는 아기엄마 마틸다(아나이스 드무스티에 분)는 그냥 언젠가 영화에서 본 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아기 이름을 지었다.
가난한 딸의 출산을 바라보는 아기의 외할머니 실비(아리안 아스카리드 분)는 만감이 교차하고, 그래서 마음은 즐겁지만은 않다. 그의 속마음을 눈치챈 남편 리샤르(장 피에르 다루생 분)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남편 다니엘(제라드 메이란 분)에게 늦기 전에 소식을 알리라고 조언한다. 실비는 다니엘에게 편지를 써 외손녀의 탄생 소식을 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출소한다. 그렇게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닌 가족과 현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가족,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시간과 현실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함께하게 된다.
‘러시아 소설, 프랑스 영화’라는 말이 있다. 오랜 시간을 통해 굳어진 선입견이란 퇴적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처럼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그것들은 까마득하지만 분명하다.
물질만능주의에 무너지는 위태로운 가족
모처럼 만나는 ‘프랑스 영화’다. 당연히 작품의 국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들은 그것조차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사가 배포한 보도자료의 서문을 장식한 감독의 말은 이 한편의 영화를 한 줄로 설명하고 있다. <글로리아를 위하여>라는 제목은 단순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아기를 위한 축사가 아닌 더 크고 간절한 중의적 의미일 수 있겠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고백이다. 매우 현실적으로 보이는 배경 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발버둥은 눈부신 희망과 칠흑처럼 어두운 좌절 사이의 어딘가에서 위태롭게 잦아든다.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내용만 놓고 설명하자 치면 ‘막장’이라 해도 가혹한 표현이 아니다.
중년의 실비는 출소한 전남편과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당황한다.
어머니는 같지만 각각 다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동복 남매 마틸다와 오로르는 끊임없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데, 중고가게를 운영하며 평소 괄시하는 가난한 이민자들을 상대로 큰돈을 벌고 있는 동생 오로르는 마약과 섹스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남자친구인 브뤼노가 언니 마틸다에게 보이는 작은 선의의 눈길조차 불만스럽다.
성실하지만 능력 없는 남편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마틸다는 아기를 출산한 후 급격히 지쳐가고, 결국 취업을 담보로 동생의 애인 브뤼노와 동침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현실 문제까지 조망하는 사회드라마
서정적이고 섬세한 음악에 발맞춰 가족들의 일상을 좇는 카메라는 짧지만 인상적으로 현대 프랑스의 다양한 풍경과 일상들을 배경으로 한다. 좁은 병실부터 인파로 북적이는 도심의 상가 거리, 한적하고 여유로운 공원 풍경, 마천루가 펼쳐진 최첨단의 고층빌딩 사무실,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는 쓸쓸한 항구까지. 어쩌면 이질적으로 보이는 풍경의 조화는 그 안에 머무는 인물들의 심상이나 관계처럼 어울리지 않지만, 뒤엉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한 가족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이민자를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조의 파업과 그들 사이의 반목, 우버 기사를 위협하는 택시기사들의 폭력, 투박한 원칙주의와 이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는 소시민의 절박함 등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등장하는데 한쪽을 일방적 가해자나 피해자로 단정하기 힘든 우리 주변의 빈번한 갈등이다.
그런 점에서는 로베르 게디기앙을 프랑스의 ‘켄 로치’로 비유하는 일각의 평가는 어느 정도 타당할 수 있겠다. 적어도 이 한편의 영화는 그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함 없어 보인다.
적당히 심란하고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이를 담담히 좇는 감독의 시선은 조심스럽고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쓸쓸한 정서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삶에 대한 열망과 조소가 충만하지만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번에 <글로리아를 위하여>를 통해 국내 소개되는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4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연출작업을 해왔지만, 한국관객들에게는 낯선 감독이다. 2011년 연출작 <킬리만자로의 눈>이 2014년 제5회 제주프랑스영화제에서 상영된 기록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이 작품이 정식으로 한국관객들에게 소개되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이라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주로 자신이 성장한 프랑스 마르세유를 기반으로 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제작자와 작가로서도 입지를 다진 인물인데, 1980년 감독으로도 데뷔한 이후 40여년 동안 20여 작품을 연출하며 왕성한 연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작품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의 희비를 담아내기 즐기는 그는 오랫동안 영화작업을 꾸준히 함께해온 동료들과 끈끈한 연대로도 유명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촬영현장은 단순히 영화를 제작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마법의 공간임이 분명하다.
“배우들이 연기하면 나는 쓰고 생각하고 만들어낸다. 우리는 공동 창작자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영향을 받고, 그들을 통해 말한다.”
아내이자 배우인 아리안 아스카리드와는 거의 모든 작품 활동을 함께 해오다시피 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섬세하면서도 억척스러운 어머니 실비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이밖에도 그의 전남편인 다니엘 역을 맡은 제라드 메이란, 현재의 남편인 리샤르 역을 맡은 장 피에르 다루생 역시 오랫동안 게디기앙 감독과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이다. 이들의 탄탄한 신뢰에 더해진 주목받는 젊은 배우들의 협연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