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이 병에 쓸 수 있는 신약이 많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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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내 편의점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잠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환자복을 입은 두 명의 남성이 항암제에 관해 토론 중이었다. 한 환자가 평소와 다른 색깔의 약을 맞고 있었는데 그게 ‘신약’이라고 했다. 이 약은 이런 게 좋다더라, 어느 병원에서도 이걸 쓴다더라, 부작용도 적다더라며 은근슬쩍 ‘신약부심’도 드러냈다. 대화를 귀동냥으로 듣던 나는 씁쓸했다. 신약 이야기를 들으면 환자나 보호자는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하듯 희망에 차오른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기존 치료법으로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경우가 딱 그랬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연구원이 신약물질을 연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삼성바이오에피스 연구원이 신약물질을 연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쓸 수 있는 선택지가 단 하나라니

아내가 진단받은 급성골수성백혈병(AML)의 치료법은 참 낯설다. 우리에게 익숙한 암은 보통 고형암이고 외과적 수술도 가능하다. 그런데 백혈병과 같은 혈액암은 피를 빼낼 수 없으니 오로지 약물을 사용해 치료한다. 보통은 이렇다. 1차는 관해유도치료다. 이때는 ‘3+7’이라는 표준 항암치료를 쓴다. 두 가지의 강력한 세포독성 항암제를 각각 3일과 7일 동안 링거처럼 여러 시간을 맞는다. 매일 혈액검사를 통해 아세포(백혈병 세포)를 체크하며 그 감소 정도를 확인하는데, 보통 70% 이상의 환자가 이때 완전관해(골수 내 백혈병 세포가 5% 미만)에 성공한다.

2차는 공고요법이다. 1차와 같은 약을 쓰거나 다른 약을 쓰기도 하는데, 몸속에 항암제를 주입하는 건 같다. 완전관해가 됐다고 해도 여전히 몸속에는 억 단위의 아세포가 남아 있을 수 있어서 그걸 없애기 위해서 한다. 이 과정을 거친 뒤 대다수의 성인 AML 환자는 재발 방지를 위해 맞는 공여자를 찾아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다. 보통 AML은 유전자 검사 결과에 따라 M0~M7의 8가지 종류가 있다. 이 병에 걸린 건 최악이지만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M3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게 된다. 유일하게 약으로도 완치 가능한, 예후가 좋은 그룹이라서다. 하지만 이런 기쁨을 누리는 건 소수다.

70% 이상이 관해에 성공한다고 했으니 우리도 그럴 줄 알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보통 ‘3+7’ 치료를 일주일 하면 혈액 속 아세포는 ‘0’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40% 정도가 남았다. 그 독한 항암약을 3일 더 맞기로 해서 총 열흘을 맞았다. 그런데도 아세포는 꿈쩍하지 않았고 40%대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치료가 시작된 지 2주일쯤 지났을 때 회진을 돈 주치의가 밖에서 날 보자고 했다.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결과가 안 좋다. 고위험군이다.” 약이 안 들으면 이 병은 정말 방법이 없다. 관해가 되지 않으면 조혈모세포 이식을 해봐야 재발 확률이 높아서다.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신약을 써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베네토클락스’라는 약은 원래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치료제로 개발됐는데 미국에서는 AML에도 효과가 있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신약마저 안 들으면 솔직히 방법이 없다고 한다. 절망 같은 대화 속에서도 나 역시 그거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는 마음이 들었다.

요즘은 환자에게 무슨 약을 쓰는지 일일이 체크하고 정보를 구하는 준전문가급 보호자가 많다. 난 그 그룹에는 속하지 않는다. 어차피 난 비전문가이고, 무슨 약을 어떻게 처방한다고 한들 그건 의료인의 영역이니까 손대지 않는 게 좋다는 쪽이다. 오히려 정보를 얻으려다 내상을 크게 입는 게 더 두려웠다. 입원 초반 AML에 관해 알아보다가 ‘결과가 안 좋다’ 혹은 ‘재발했다’며 곤란에 처한 글들을 덩달아 보면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내 멘털을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불필요한 정보 접근을 하지 말자고 결심했던 계기였는데, 유일하게 미국식품의약국(FDA) 논문까지 검색해가며 정보를 구한 게 이 ‘베네토클락스’였다. 주치의에게 쓸 수 있는 약이 이것밖에 없는지 물었다. “이 병에 쓸 수 있는 신약이 많지 않아요.” 우울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약회사의 유행 변화에 감사하기

일단 이 병이 정말 다루기 어려워 신약 개발이 힘든 것도 이유일 거다. 하지만 더 큰 건 시장성이다. 암 중에서 환자가 많은 암종은 다양한 신약을 찾아볼 수 있다. 화학항암제 시대를 지나 표적항암제가 등장했고, 요즘 최신 트렌드라고 하는 면역항암제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폐암은 신약 개발이 활발한데 환자 수가 많고 사망률이 높은 편이라 개선의 여지가 많아서란다. 국가암정보센터 기준 최신 자료인 2017년 현황을 보면 위암, 대장암, 폐암 환자는 1년에 대략 3만명 정도 생긴다. 반면 백혈병은 3000명 정도다.

그나마 최근에는 AML에서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일 경우 사용할 수 있는 표적치료제가 등장했다. 환우회 카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약은 FLT3(FMS-like tyrosine kinase 3) 유전자 변이를 동반한 환자들이 임상으로 먹고 있는 ‘길테리티닙’이다. 이런 변화는 시장이 변화하면서 생겼다. 해외저널을 찾아보니 감사하게도(?) 제약회사의 유행이 바뀌면서 이제는 백혈병 관련 신약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단다. 환자가 많은 곳은 이미 포화상태라 개발 비용에 비해 성과가 불확실하니 상대적으로 저비용인 소수의 희귀질환에서 이익을 거두려고 한단다. 그간 시장성이 없다는 그들의 판단 덕에 AML 환자들은 약 40년 정도를 ‘3+7’ 치료법에만 의존해 왔다.

베네토클락스를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권한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신약이라 비급여이고 그래서 비쌌다. 알약이라 하루에 한 번, 네 알을 4주 동안 먹는데 대략 1000만원 정도 든다고 했다. 이만큼 비싼데도 확신을 줄 만한 사례가 국내에는 거의 없던 것도 문제였다. 베네토클락스를 제안받았던 때가 2019년 12월이었는데 당시에는 환우회에서도 이 약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막 한국에 들어온 약이었으니 주치의도 한 번 처방해봤다고 했다.

관해치료가 실패하고 재관해치료까지 실패한 뒤 우리는 신약을 최후의 보루로 선택했다. 하루에 네 알씩 입속에 넣으며 아내는 “40만원짜리 먹방”이라고 했다. 4주 뒤 우리는 기적처럼 완전관해에 도달했고,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할 수 있었다. 단 하나 있던 선택지가 우리에겐 정답이었던 셈.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게 오답일 수도 있다. 그럴 때 또 다른 선택지가 하나쯤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아마 이 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의 바람일 터다.

<제이든 칼럼니스트·전 기자(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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