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노하우를 믿는다며 찾아오는 환자들이 좇는 건 결국 병을 낫게 해줄 거라는 신뢰다.
중증환자를 둔 집은 의료 관련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운다. 요즘 우리는 의사 파업 소식에 관심이 많다. 혹시나 아내의 치료에 지장이 없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뉴스를 보면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대한의사협회와 정부지만 해법이 다를 뿐, 의료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인식에는 공감하는 것 같다. 뻔한 말이지만 의료 격차란 단어는 암처럼 큰 병이 생기면 무시 못 할 현실이 된다.

구급차 안에서 서울 한강이 보인다. 많은 중증환자들이 확진 이후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에서 치료 받기를 원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줌마는 어디서 왔어요?” 조용했던 외래주사실, 나란히 누운 중년 여성들이 대화를 시작했다. 암병동의 외래주사실은 마치 주사 맞는 공장 같다. 구역별로 놓인 수십 개의 침대와 의자에 사람들이 줄줄이 누워서, 혹은 앉아서 약을 맞는다. 이곳은 통원하며 치료하는 이들만을 위한 공간이다. 누군가는 당장 암을 다스리기 위해 항암제를 맞을 테고, 그런 과정을 이미 거친 이들은 후처치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아내도 조혈모세포 이식을 하고 퇴원한 뒤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와서 면역증강제를 맞는다. 우리가 맞는 약은 아직 몸속에서 항체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공항체를 만들어준다. 2~3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시간 동안 아내는 잠을 청한다. ‘암’이란 단어를 끼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활력이 넘칠 리는 없다. 가끔은 그 모습들이 조용함을 넘어 우울한 색을 띨 때도 있다.
함께 누워 주사 맞는 전국 8도 사람들
침묵이 주로 흐르는 곳에서 말소리가 나오니 원하지 않아도 들린다. “아유,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몹쓸 병이 왔는지 모르겠어요.” 머리에 헝겊 비니를 쓴 채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같은 난소암 환자였다. 환자와 함께 온 남편들은 그 2~3시간을 견디기 위해 합의라도 한 듯 주사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어디서 왔어요? 난 태백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서 왔는데”, “광주에서 왔어요. 우리도 새벽에 KTX 타고 올라와서 피곤해 죽겠네요.” 그러자 태백의 환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우리는 시골이지만 광주에는 병원 없어요?”, “있어도 다 이쪽으로 올라와서 병원 다니잖아요. 힘든 것만 빼면 괜찮아요.”
듣고 있던 맞은편 보호자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기는 엄마를 모시고 부산에서 어제 올라왔다고 했다. 담낭암인데 처음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진단받자마자 여기로 와서 수술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15분 거리에 사는 우리는 행운아 같다.
무균실에 있을 때 초등생 여자아이가 신입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남 걱정할 때는 아니었지만 무균실에 들어오는 어린애가 측은해 보였다. 림프종 판정을 받은 아이는 4주 단위로 항암치료를 받는단다. 이곳은 어른도 답답해하는 곳이니 아이는 오죽했을까. 날이 갈수록 꼬마의 짜증이 폭발하는 게 보였다.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먹고 싶은 걸 먹지도 못한다. 인상 깊었던 건 애 엄마의 대처였다.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좋은 말로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가도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면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밀당의 고수였다.
하루는 보호자 탈의실에서 이 엄마와 우연히 부딪치는 바람에 조금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보호자들의 대화란 건 공유하는 과정이다. 환자가 언제부터 아팠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그 과정을 알게 된다. 지방에 살던 그의 사연은 이랬다.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났다. 집 근처 병원에 가니 입원하자고 해서 따랐는데 의사는 발열의 원인을 정확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열흘 남짓을 기다린 뒤에 들은 게 림프종이라는 병이었다. 병원에서는 계속 입원하길 권했지만 아이 엄마는 병원이 미덥지 않아 퇴원하기로 했다. 그리고선 이 병원의 응급실로 직행해 들어왔다고 했다. 이곳에서 하루 동안 들은 얘기가 거기서 일주일 동안 들은 얘기보다 많단다. 그 일주일을 허비한 게 너무 속상하다며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시간을 버린 탓에 아이가 더 나빠진 건 아닌지, 혹시나 애가 그 시간 때문에 잘못되는 건 아닌지 괴롭다고 했다. 그 괴로움은 이해가 됐다. 나 역시 스스로 셀 수 없을 만큼 과거의 일을 복기하고 자책했던 때가 있었다.
‘신뢰’를 지방에 나눠줄 수 있을까
내 가족에게 큰 병이 생기면 누구든 이런 맘을 먹는다. 무조건 서울로 가서 실력 좋다는 병원에서 낫게 하겠다고. 그런데 병을 나중에 공부하고 나면 그 선택이 무조건 옳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전 글에도 언급했지만 내 아내는 급성골수성백혈병(AML) 환자다. 이 병은 고위험군을 제외하면 표준치료를 따른다. 1차 항암에는 어떤 약들을 써서 완전관해를 유도하고 2차 항암에는 어떤 약들을 써서 공고화를 한다는 방법론이 딱 서 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치료 과정이 대체로 비슷하단 뜻이다.
반면 합병증을 조심해야 하는 병인데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뒤 생기는 부작용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식한 환자가 두려워하는 것이 이식편대숙주병이다. 이식으로 몸 안에 수혈된 림프구가 환자의 몸(숙주)을 공격해 생기는 병이다. 구강부터 피부, 장기 등 언제, 어디로 올지 모르는 게 문제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한 번쯤 겪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럴 때 재빨리 병원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지방 거주 환자가 입원했던 서울 소재 병원으로 신속하게 들어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퇴원할 때 간호사가 우리에게 알려줬던 주의사항 중 하나가 이거였다. “열이 얼마 이상 오르면 무조건 응급실로 오셔야 해요.” 다행히 근처에 사는 우린 가능하지만 이게 가능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전원을 논의하러 한 메이저 병원에 갔을 때 권위자로 평가받는 유명 교수는 내게 입원하려면 대기가 너무 길다고 했다. “이대로 기존 병원에서 치료받으라고 해도 이식만은 여기서 받겠다며 오는 사람도 있다”며 환자가 너무 많단다. 경험과 노하우를 믿는다며 찾아오는 환자들이 좇는 건 결국 병을 낫게 해줄 거라는 신뢰다. 응급실에 침대가 없다고 해도 복도 의자에서 수액을 맞아가며 입원실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도 이곳에서는 나를 낫게 해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 신뢰를 지방에 나눠줄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지방에 의사가 더 많이 근무한들 환자들은 계속 서울로 오지 않을까.
<제이든 칼럼니스트·전 기자(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