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구원을 포기한 두 남자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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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DELIVER US FROM EVIL)

제작연도 2019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08분

장르 범죄, 액션

각본·감독 홍원찬

출연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외

개봉일 2020년 8월 5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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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 여관. 불이 꺼지고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한 남자가 잠입한다. 야쿠자들과 그들의 두목을 살해한 이 남자. 살인청부업자다.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졌으면 꽤 시끄러웠을 것인데, 어쨌든 사건은 묻히고 남자는 떠난다. 살인을 의뢰한 측에서는 “한 건만 더 할 수 있느냐”고 문의하지만 남자는 거절한다. 그는 어느 날 이자카야에서 문득 본 그림 속의 낙원, 파나마의 인적 드문 해변에서 여생을 보내는 걸 꿈꾼다.

실제 비행기표도 알아보고 묵을 장소도 구해놨지만 이 남자는 결국 그곳에 갈 수 없었다. 받지 않았던 ‘한 건’이란 자신이 살해한 야쿠자의 친동생 레이를 처리하는 것이다. 자이니치 출신인 레이 역시 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로 희생자를 매달아 놓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배를 가르는 냉혈한이다. 형의 복수를 위한 그의 추적은 집요하다.

살인청부업자와 추적하는 야쿠자

인남(황정민 분)이 어쩌다 살인청부업자가 되었는지 과거에 대한 단서는 영화 속에 많이 제시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주어진 정보로는 그는 한국의 정보기관(국정원일까)의 비밀요원이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특수작전을 수행해온 인물이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이 팀은 해산된다. 해산의 과정도 그냥 ‘말소’다. 한국을 뜨게 된 날 여자친구를 찾아가던 인남을 추적한 추격팀은 다짜고짜 총을 꺼내 그를 죽이려 한다. 자신을 죽이러 온 비밀요원들을 몰살시킨 그는 외국으로 도피한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벌어지는 사건. 여자친구의 딸이 인신매매조직에 납치된다. 인남의 과거 조직 상사에게 휴대폰 메시지만 남긴 여자친구는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본능적으로 인남은 여인이 기르던 딸이 자신이 남긴 혈육이라는 걸 알게 된다. 딸을 찾으러 나서는 인남. 그리고 혈혈단신 그 뒤를 쫓아오는 냉혈한 야쿠자 레이(이정재 분). 주변 사정이 어떻든 두 사람의 대결이 낯선 이국땅에서 벌어진다.

스토리만 요약해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많은 영화가 있다. 이를테면 <제이슨 본> 시리즈. 여러 나라 국경을 넘나들며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제이슨 본과 그를 추격하는 집단의 배경엔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특수요원 양성프로젝트가 있고, 프로젝트가 폐기되자 관련된 이들은 모두 제거해야 하는 비밀 임무’ 이야기가 있다. 딸을 구하러 나서는 전직 비밀특수요원 아버지라는 플롯의 작품은 많다. 리암 니슨 주연의 <테이큰>(2008)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이를테면 본 시리즈의 주요 눈요깃감인 극한의 리얼리티 추구-이를테면 추격자를 따돌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007시리즈 같은 첩보영화처럼 기상천외한 무기를 동원하거나 최첨단의 슈퍼카를 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소란을 일으켜 군중 속에 숨는 것-라든가 악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장연설(한국에서 인터넷 밈이 된 “딸을 놔주면 여기서 끝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을 찾아내서 반드시 죽여 주겠다”와 같은 아버지 브라이언 밀스의 대사 같은)은 기대할 수 없다.

연출도 마찬가지다. 인남이 홀로 인신매매조직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태국 깡패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다. ‘일대다(一對多)’ 격투신 하면 떠오르는 <올드보이>(2003)의 복도 신과 같은 스타일리시한 장면은 눈에 띄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큰 인상을 남기지 않는 평범한 연출인데, 어떤 이들에겐 그게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로 뽑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영화를 감싸는 허무주의 정서

영화를 감싸고 있는 것은 니힐리즘, 허무주의 정서다. 이정재가 맡은 레이가 자신의 형을 죽인 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까. 시작은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점점 그 복수의 의미는 퇴색한다. 그를 움직이는 힘은 ‘형의 복수를 위해 끝까지 추적한다’는 정념의 진짜 본체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삶에 대한 강한 욕구도 없고, 죽음의 의미에 대해 거창한 의미 부여도 없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가는 길에 나타난 강력한 방해자를 제거하겠다는 생각뿐, 그를 움직이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인남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져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딸만은 그러한 악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끝맺는 주기도문에 따왔다고 감독은 밝힌다. 영화의 정서가 장르를 압도하는 영화다. 나름 희한한 경험이다.

코로나 이후 블록버스터는 다시 나올 수 있을까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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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 코로나19가 세계적인 유행병이 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도 한국계 전직 비밀요원과 자이니치 출신 야쿠자가 이국땅 대로에서 한낮에 종횡무진 벌이는 결투 장면-차량 추격에 총격전, 그리고 몸싸움까지 포함해-이 낯설게 느껴진다. ‘저렇게 마스크를 안 쓰고 활보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사 후 열린 기자간담회(사진)에 오랜만에 참석했다.

주연을 맡았던 황정민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중동에서 영화를 찍고 있어서 위성 화상 중계 형식으로 기자들과 실시간 질의응답을 했다. 그가 현재 찍고 있는 후속작이 해외로케이션이 반드시 필요한 영화라 2주간 격리생활을 마치고 영화를 찍는다고 했다. 비록 1~2초 정도 딜레이는 있었지만, 의사소통엔 무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형식의 비대면 기자회견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어쨌든 코로나19가 많은 걸 바꾸긴 했다. 영화관 문화 역시. 코로나 이후의 시사는 영화관에 입장하기 전에 체온을 재고, 휴대폰 QR코드를 찍어 영화를 보는 인적사항을 넘겨야만 한다. 생각해보니 QR코드가 가져가는 정보가 어떤 정보인지는 통보받지 못했는데, 휴대폰 번호에 들어가 있는 개인정보 대부분을 가져갈 것이다. 만약 같은 시간대의 상영관 안에서 감염자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기자도 역학조사 대상에 오를 것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몇 주 전 앞서 개봉한 <반도>, <강철비 2: 정상회담>과 함께 올해 블록버스터 기대작 3편 중 하나였다.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뉴스를 살펴보니 이 영화의 사전 예매량은 약 10만장으로 전체 예매의 51.6%를 차지했다고 한다. 느리지만 삐걱거리며 세상은 다시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듯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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