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비바리움(Vivarium)
제작연도 2019
제작국 미국 외
상영시간 97분
장르 SF, 드라마
감독 로어칸 피네건
출연 제시 아이젠버그, 이모겐 푸츠 외
개봉 2020년 7월 16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 ㈜루믹스미디어
배급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날개엔터테인먼트
출근하는데 아내가 물었다. “오늘 무슨 영화 봐?”, “잘 몰라. ‘바바리움’이라고”. 시사 장소를 체크하기 위해 메일함을 보니 영화제목도 틀렸다.
<비바리움(Vivarium)>이었다. 비바리움? 생태동물원 아닌가. 영화의 시작 장면. 뻐꾸기 새끼가 다른 새의 둥지를 파고들어 독차지한다. 다른 새들을 둥지 밖으로 밀쳐 떨어뜨려 죽인다. 그리고 태연하게 자신보다 덩치 작은 새의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다. ‘아, 오늘 영화 장르가 자연다큐였던가’라는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여주인공 젬마가 등장한다.
교외 단독주택단지에서의 삶과 욕망
젬마와 남자친구 톰은 함께 살 집을 알아보고 있다. 이날 오후의 스케줄은 교외에 조성된 단독주택단지 방문이다. 부동산 업자를 따라간 단지는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모든 집은 다 연두색 계열로 칠해져 있다. 2층의 아이 방은 푸른색으로. 뒤뜰을 구경하는 틈에 부동산 직원 마틴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차를 타고 돌아가려는 젬마와 톰은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이 처음 소개받았던 ‘9호’ 집 인근만 뱅뱅 맴돈다.
한밤중이 되어 불이 켜져 있는 집을 발견해 도움을 청해보려 했으나, 그 집은 다시 9호 집이었다. 휘발유가 떨어진 자동차는 퍼졌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루를 그곳에서 머문다. 다음날, 이 똑같은 집이 이어져 있는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 해가 지는 방향으로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그들의 집 앞에는 생필품이 든 상자가 배달된다. 꼼짝없이 갇힌 것이다. 이튿날 배달된 상자엔 아기가 들어 있었고, 아이를 키워내야 그들의 미션이 종료된다고 상자에 적혀 있다.
영화의 결론은 모호하다. 장르는 자연다큐가 아닌 SF판타지. 열린 결말이다. 그들이 갇혀 있는 동네엔 주민이 없다. 당연히 아이의 사회화엔 부족하다. 아이가 배우는 것은 이들 남녀가 싸우고 갈등하며 후회하며 낸 탄식 따위를 따라하는 식이다. 개를 본 적 없는 아이는 ‘개=멍멍 짖는 존재’로 생각한다. 주종이나 서열에 대한 의식은 없다. 아이와 의사소통은 쉽지 않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예를 들어 아침에 콘플레이크에 우유를 부어줄 때까지 비명을 지른다. 아이의 성장 속도는 빠르다. 98일 만에 아이는 만 4~5세 정도로 자라난다. 여전히 사회성은 결여된 채.
영화는 열린 결말이지만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완결적이다. 첫날 부동산을 방문한 남녀 주인공은 그들을 맞이하는 부동산 소개업자 마틴의 태도에서 무언가가 ‘결여’돼 있음을 느낀다. 주인공들이 사라진 후, 청년으로 자라난 아이는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가 노쇠해 죽은 마틴의 시체를 처리하고 자신이 마틴이 된다. 생각해보니,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맡아 기르게 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다. 젬마는 아이를 ‘소년(boy)’이라고 칭했고, 뭔가 기분 나쁜 존재라는 것을 눈치챈 톰은 소년이 아니라 ‘그것(it)’이라고 부른다.
SF판타지 형식을 빌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통찰은 무얼까. 현대사회에서 집, 그리고 가족의 본질이다. 현대사회에서 공적 영역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다는 통찰을 내놓은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다. 두 남녀의 처지는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서구 현대 가족의 행복한 삶을 전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뒷마당이 있는 교외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 살며, 해고나 노동의 고단함을 걱정할 필요 없이 생필품은 그때그때 공급받는다.
그런데 그 사적인 공간은 철저히 파괴되고 감시받는다. 두 사람 곁에 어느 틈에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 아이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삶과 사랑, 기호는 모두 자기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유란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 불과하다. 전 세계의 이케아 매장에서 동일한 서랍장을 놓고 선택 장애에 시달리는 현대의 청춘들처럼 말이다.
SF판타지 형식을 빌려 말하고자 하는 건
영화제목도 그렇지만, 인트로에서 둥지와 먹이를 강탈한 뻐꾸기 장면은 영화가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를 처음부터 결정해 들어간다. 환유법을 사용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트로다. 영화를 보고 회사로 들어와 보니 영화사 측에서 친절하게 스크리너도 보내놓아서 한 번 더 봤다. 다시 보니 환유는 뻐꾸기 새끼들에 밀려 땅으로 떨어져 죽은 새끼 새들을, 남자주인공 톰이 땅을 파서 묻어두고, 마치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낙엽 등을 끌어모아 덮어주는 장면까지 해당한다. 영화가 담고자 한 삶의 전형성은 과연 무엇인가를 두고 여러 입장의 토론이 가능할 듯싶다. 사색의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될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추천할 만한 영화.
<큐브>의 선례에 따라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
![[시네프리뷰]비바리움-현대사회에서 집과 가정의 의미에 대한 통찰](https://img.khan.co.kr/newsmaker/1386/1386_77.jpg)
덴마크에서 지난해 제작된 영화인데, 한눈에 봐도 저예산 영화다. 세트? 주인공들은 여러 집의 담장을 넘어 탈출하려고 모험하지만 딱 두 채만 지으면 된다. 담을 넘어가게 되는 곳도 결국은 같은 형식의 집들이므로. 과거 영화 리뷰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이런 종류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영화가 빈첸초 나탈리 감독의 영화 <큐브>(1997·사진)다. 각각 다른 살인 장치가 있는 정사각형 방들을 주인공들이 간신히 살아남아 넘나든다는 설정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세트에 조명과 장치만 달리하면 무한대로 큐브를 확장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 ‘비바리움’도 일종의 스포일러다. 그들이 살고 있는 이 폐쇄된 생태계는 누군가의 감시 내지는 <트루먼 쇼>(1998)의 짐 캐리처럼 엿보기를 당하고 있으니까, 일종의 생태동물원인 셈이니 말이다. 빈첸초 나탈리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결국 의문이 남는다. 이 거대한 감옥을 운영하며, 자신이 세운 룰을 지키지 않거나 과욕을 부린 이들에게 벌을 내리는 ‘전지자’는 과연 누구일까.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들이 고민했듯이 이 만물의 법칙을 주관하는 자는 인간의 이성과 자연법칙 속에 깃든 일종의 자동장치 기계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을까. 비슷한 의문이 열린 결말을 유지한 채 끝나는 <비바리움>에도 들 수 있다. 적어도 소년이 내는 ‘흉내’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은 맞다. 그럼 이 집, 가정이라는 감옥 세트를 만들어낸 것은 지구인을 납치해 관찰하던 외계인? 아직 결론 낼 수 없다. 영화가 히트친다면 <큐브>처럼 그 답을 찾는 후속편들이 만들어질 텐데 과연 그럴지는. 속단하긴 어려울 듯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