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한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이 출간됐다. 김홍모·윤태호·마영신·유승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시리즈는 각각 제주 4·3,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다뤘다. 나란히 한 케이스에 꽂힌 네 권의 책 중 유승하 작가의 <1987 그날>을 먼저 꺼내들었다. 당연히 영화 <1987> 개봉 후 있었던 논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화 <1987>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사건을 중심으로 1987년 대투쟁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에 대한 답을 써내려간 영화다. 결집한 민중의 위대한 힘을 웅변하는 작품답게 영화는 다수의 인물로 주연을 구성한다. 모두 실존했던 남성들 사이에 김태리 배우가 분한 ‘연희’는 유일하게 여성이자 허구의 인물이었다. 진실의 무게와 시대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남성들 사이에서 연희는 정치도, 역사도 관심 없는 ‘평범한’ 시민의 얼굴을 표상했다. ‘잘생긴 운동권 오빠’에게 반해 이 역사의 흐름에 뛰어든 연희 모습에 불편함을 느낀 여성들이 많았다. 영화 <1987>이 여성들을 지웠느냐, 아니냐의 논란이 분분했다. 황진미 평론가는 연희가 강렬하진 않지만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높이 샀다. 그의 말처럼 물론 영화 속에도 당시 여성들이 투쟁의 주체로 움직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은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사람 눈에나 또렷이 보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이 도드라지는 건 연희일 수밖에 없다.
유승하 작가가 그러한 논란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승하 작가 또한 그 당시 투쟁의 흐름에 참여한 여성이었으니, 그가 어떻게 다른 ‘1987’을 써낼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장을 열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작중 인물소개란에서 ‘이름’을 가지고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여럿의 ‘여성들’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것은 안도였고, 어쩐지 뭉클함이었고, 왠지 모를 서글픔이었고, 무엇보다 기대감이었다.
영화 <1987>의 연희라는 캐릭터에서 느낀 아쉬움 중 하나는 여성은 왜 남성을 매개로 해서만 자신의 역사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만화 <1987 그날>은 당시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다양한 서사를 드러낸다. 대학생 진주는 사회적 책임과 불의를 눈감을 수 없어 운동에 동참한다. 그의 친구 혜승은 가족과 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언니의 죽음을 사유하며 시대에 다가간다. 가난 속에서도 미대에 진학하려 애쓰다 좌절하는 나리는 민중미술을 통해 ‘그날’의 작은 물결이 된다.
<1987 그날> 역시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지만 상계동 강제철거, 신촌 벽화 사건 등 철거민 운동, 민중미술의 역사가 1987년의 흐름에 어떻게 함께했는지 놓치지 않는다. 혜승의 언니의 모델로 삼은 ‘박혜정 열사’의 죽음과 같이 ‘열사’가 되지 못한 죽음이 이 역사 속에 무수히 함께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유승하라서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서사가 종종걸음을 치는 듯한 느낌은 조금 아쉽지만, 한편으론 그 종종거림이 ‘여성의 목소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도, 역사도 되지 못한 채 내 안에만 구겨 넣어진 분투의 기억이 작은 물꼬를 만날 때 내는 소리 말이다.
<박희정 기록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