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옥은 한 시대, 한 민족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전시관이나 마찬가지다. 한옥은 한국의 문화 의지를 가장 잘 표출하고 있다. 한옥을 ‘자연과 하나되는 공간’ 혹은 ‘자연과 장인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연’이라고 한다. 이는 한옥의 건축양식과 재료 선택 등에 녹아 있는 문화 의지가 인위적이거나 가공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자연친화적 가옥이라는 얘기다. 한옥만큼 자연적 특성 잘 살린 전통가옥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정사업본부는 3월 26일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부용정 등을 소재로 한 ‘한국의 옛 건축’ 시리즈 첫 번째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우정사업본부가 세계적 자랑거리인 한국의 가옥을 소재로 한 시리즈 우표, ‘한국의 건축물’을 발행한다. 시리즈 중 첫 작품은 지난 3월 26일 발행한 ‘한국의 궁궐’이다.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부용정,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석조전 등 4대 궁궐의 대표적 건축물을 담았다. 기념우표 88만 장과 소형시트 11만 장이 발행됐다. 특히 소형시트는 지역별 국제통상 요금을 적용했다. 외국의 우표수집가를 위한 배려다.
한옥의 진수는 두말할 필요 없이 궁궐이다. 궁궐은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교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건축물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유교의 중심 사상인 예(禮)에 벗어나 있는 게 더 많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로 지은 궁궐은 경복궁뿐”(임석재 이화여대 교수)이다. 경복궁의 구도가 예를 지켰지만 경복궁 내 개별적 건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연과 잘 어울리는 한옥일 뿐’이다. 우표에서 소개한 ‘경복궁 자경전’도 그렇다.
자경전은 1867년(고종 4)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대비전이다. 자경전은 총 44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도록 했다. 뒷마당에는 십장생이 새겨진 굴뚝이 유명하다. 경복궁의 침전 중 고종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재건되기 이전에는 조선 초기 왕의 침전으로 쓰인 자미당이 있었다. 자경전은 조선 후기 조선의 운명처럼 수많은 곡절을 겪었다. 1873년(고종 10)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했으나 불과 3년 뒤 다시 불에 탔다. 1888년(고종 25) 중건됐다.
조선 후기의 문헌지 <궁궐지>에 따르면 ‘창덕궁 부용정’은 본래 1707년(숙종 33)에 ‘택수재’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1792년(정조 16)에 이름을 ‘부용정’이라 고쳤다. 정조는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축하했다. 또 수원 화성이 완성된 뒤에는 신하들과 어울려 꽃과 시를 짓고 낚시를 즐겼다. ‘열십(十)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와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를 이루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물로 역사적·예술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창경궁 명정전’은 1483년(성종 1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이 2층 건물인 것과 달리 앞면 5칸, 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규모가 작다. 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쓰였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서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해 건축사 연구의 귀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은 1900년(광무 4년)에 착공해 1910년(융희 3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조선의 다른 궁궐과 달리 왕의 침전과 정전(업무공간) 기능이 모두 통합돼 있다. 황실의 처소를 비롯해 여러 용도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2009년 10월에 복원공사를 시작했고,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김경은 기획위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