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희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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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매를 키우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는 풍경 보는 걸 좋아합니다. 사무실 창밖 너머 멀리 보이는 북한산이 눈에 자주 들어옵니다. 그 풍경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미세먼지가 뿌연 날엔 산의 형태조차 보기 힘들지만, 화창하고 시계가 또렷한 날엔 갈색 기운이 도는 코발트블루 빛으로 그 자태를 한껏 뽐냅니다. 햇빛이 강하게 비출 땐 마치 만년설인 양 봉오리 사이사이가 거울에 반사된 듯 눈부신 은빛을 띱니다. 해가 지고 노을빛마저 흐려지면 산의 빛깔도 점점 어두워지며 이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됩니다.

[내 인생의 노래]박경희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고하며 얼마 전 책을 썼습니다. 10년간 매일 통화하던 어머니를 갑자기 잃고 황망한 마음에 책을 쓰며 마음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책에는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초등학교 입학식을 치르던 날 이야기, 이미 많은 장맛비를 맞은 채 우산 들고 전철역에 마중 나오신 어머니, 크리스마스이브 밤 성당에서 절실하게 기도하셨던 어머니를 바라보았던 소회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29세 늦깎이 아들이 아나운서로 입사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밥을 차리고 아들을 깨우셨습니다. 이마를 손수건으로 단단히 조여 간신히 정신을 차리던 어머니에게 아들 출근길 밥상은 일생의 소명이자 자신과의 치열한 전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월급을 받게 되자 어머니는 적금에 들자고 하셨고, 3년 만기 1000만원짜리 적금에 가입했습니다. 3년 후 1000만원의 종잣돈이 생겼고 그걸 밑천으로 조금 더 큰 적금에 가입했습니다. 무언가를 소박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머니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는 가족 간 사랑의 열매는 무럭무럭 익어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기력이 쇠해지고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을 마주하며 가슴 아파했던 기억들을 기록했습니다. 오직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오셨건만 신체 기능이 다해가고 있을 때도 언제나 그러하셨듯, 어머니는 온전히 혼자 기도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매일의 태양처럼 우리 인생엔 새 생명이 태동하고 찬란한 시간이 이어집니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조금씩 기울고 이윽고 하루가 저물 듯 우리 인생도 그런 순간순간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치 사무실에서 바라본 북한산 풍광이 변화하듯이 말입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박경희의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갔던 성당에서 손잡고 강론을 듣고 있는데 신부님이 저희 모자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어머니와 아들이 손을 잡고 앉아 있습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오늘은 이 노래를 불러보겠습니다.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다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비록 어머니의 유언은 듣지 못했지만 그 유지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때론 어머니 생각에 벅차오르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늘 당당하고 떳떳하게 제 인생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살기를 바라실 겁니다.

갈 곳도 없이 떠나야 하는가
반겨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꿈길을 가듯 나 홀로 떠나네
미련 없이 떠나가네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다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리
눈이 내리면 두 손을 벌리리
그대를 두고 떠나온 마음을
가는 길에 묻어두리

<신동진 MBC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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