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톤스 <겨울의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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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사의 추억, 좋은 결말이 아니어도 괜찮아

지금 나는 주로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몇 년 전엔 장사를 했다. ‘내 그림은 귀엽다. 그러니 내 그림이 들어간 제품을 만들어 팔자!’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장사에 소질이 없었다. 직원을 고용할 여력이 없어서 혼자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게다가 제품은 잘 팔리지 않았다.

[내 인생의 노래]페퍼톤스 <겨울의 사업가>

어느 겨울, 경기도의 한 백화점 행사장에 자리를 얻어 간 날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도 못 하고 매대 옆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날 매출도 형편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바깥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마감시간이 되어 나왔을 땐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팔지 못했으니 고스란히 되가져가게 된 짐이 산더미였지만 부를 수 있는 택시도 없어서 서울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한참이나 지나 버스가 느릿느릿 정류장에 도착했다.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그대로 하늘을 보고 눕고 말았다. 창피해할 여유도 없이 벌떡 일어나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긴장이 풀리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이 힘든 것은 괜찮았다. 힘들지 않게 일하는 방법은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날 매출이 시원찮았던 것도 괜찮았다. 공치는 날도 있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문득 이런 공포가 밀려왔던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고생이, 언젠가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판명되면 어떡하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언제나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누구도 고생하는 동안 불평하지 않고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거대한 공포로 다가왔다. 그날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조용히 울었다.

이런 이야기 끝엔 ‘그러나 나는 그 시기를 잘 이겨냈고,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란 결말이 나와야 할 것 같지만, 나는 망했다. 수중에 돈 한 푼도 남지 않고 갈 곳 없는 삼십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군분투한 그 시간에 아무 의미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내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을 헤매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것 하나를 깨닫기 위해 지나치게 긴 시간을 쓴 것 같긴 하지만, 괜찮다. 살다보면 제값보다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 때도 있는 법이니까.

페퍼톤스의 <겨울의 사업가>는 두 청년이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들떠서 눈이 오는 겨울 거리를 뛰어다닌다는 노래인데, 장사를 하는 동안 열심히 들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어쩐지 힘이 나곤 했다. ‘쌓여가는 저 눈만큼 우리의 부와 명성도 쌓여갈 거야’라는 가사를 지금 들으면 망할 줄도 모르고 의욕 넘치던 시절이 떠올라서 헛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괜찮다. 결말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덕분에, 그렇게 열심히 달려볼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 시절, 어리석고도 행복했다.

어느 조용한 토요일 오후에 긴 토론 끝에 우리는
아무도 생각한 적 없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어
모든 계획이 세워진 후에
우린 코트를 입고 거리로 나와
아무렇게나 앉은 채로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지
무표정한 이 도시에 축복 같은 하얀 눈이 내려
쌓여가는 저 눈만큼 우리의 부와 명성도 쌓여갈 거야
큰소리로 웃으며 하얀 거릴 달렸지
찬바람을 가르며 같은 노랠 불렀어
짧았던 날들 남김없이
겨울의 사업가

<도대체 작가·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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