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기업에 애자일(Agile)은 신앙이다. 예측 불가하고, 시시때때로 급변하는 시장 조건 안에서 성공적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선 기민하고 민첩한 방법론이 불가피했다. 탄탄하고 치밀한 기획 문서에 기반을 둬서 코드를 써내려가다 보면, 시장의 수요는 바뀌어 있고, 기술적 환경은 저 멀리 달아나 있는 경우가 빈번했다. 2001년 이후 소프트웨어 기술기업들이 애자일을 생존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애자일은 공정 관리 측면에서 포디즘을 잇는 대안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
애자일의 장점은 속도다. 재빨리 시제품을 만들어 시장의 반응을 묻고, 뜯어고쳐서 다시 시장이 내놓는다. 피드백 루프라 불리는 이 과정을 짧은 기간에 무한 반복하면서 하나의 소프트웨어를 거대한 플랫폼으로 진화시킨다. 이젠 익숙해진 ‘영원한 베타’라는 말도 뿌리는 애자일이다. 완성태가 없는, 끝이 없는 과정으로서의 소프트웨어 개발, 그것이 애자일의 본질이다.
방법론으로서 애자일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노동 과정에 개입한다. 빠른 의사 결정, 시장 피드백, 학습을 통한 수정과 업데이트 등 애자일 방법론이 제안하는 주요 공정은 엔지니어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시장 환경의 변화’를 노동 과정에 거름막 없이 투영한 반응적 규범 체계이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검토할 시간에 한 줄의 코드라도 더 작성해 시장의 피드백을 수용하는 것이 이 세계의 선이다.
그래서 애자일은 노동조합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애자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응 속도를 떨어뜨린다. 단체협약·임금협상·파업 등 노동조합의 권리 행위는 애자일이 기피하는 제동 장치들이다. 엔지니어들의 반응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제품의 혁신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애자일을 ‘애정’하는 거대 기술기업들이 비노조 정책에 집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아마존 등 거대 기술기업에서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급기야 글로벌 크라우드펀딩 스타트업인 킥스타터에서 국제사무관리직노조(OPEIU) 산하 노조가 정식으로 출범하기까지 했다. 지난 2월 19일의 일이다. 킥스타터는 실리콘밸리 밖 실리콘밸리 기업이다. 그럼에도 실리콘밸리 기풍의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화이트칼라 정규직 노조가 설립된 것은 미국 내 최초의 사례이기에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1982년 아타리 노동자들의 항의 시위, 1992년 반도체 기업 베르사트로닉스 노동자의 파업 이후 거대 IT의 노조 설립 명맥은 사실상 끊긴 상태였다. “비노조로 남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했던 인텔 공동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의 선언, 1980~1990년대 생산 라인의 외주화 등으로 실리콘밸리는 노조의 어떤 도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여기에 킥스타터 노조가 균열을 낸 것이다.
거대 기술기업들도 교활하게 맞서는 중이다. 반노조 컨설팅업체와 계약을 맺고 엔지니어 노동자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관련자들에 대한 해고도 서슴지 않는다. 애자일 방법론을 지탱시킬 수 없는 모든 문화적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노조 설립이 실리콘밸리의 문화와 공존할 수 없기에 대응 방식도 거칠다.
킥스타터 노조 설립을 계기로 스톡옵션과 고액 연봉으로 덮어왔던 실리콘밸리 ‘노동철학’의 민낯이 드러났다. 이제 그들의 문제해결 능력은 애자일과 노조의 충돌이라는 난제를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조차도 애자일 방법론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해결책이 무엇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다만 결론이 자동화의 가속페달 밟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성규 메디아티 미디어테크 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