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3·1운동 임시정부 100년’ 사업도 서서히 마무리되고 있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은 잊힌 독립운동가,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를 찾는 사업에 역점을 두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밤을 지새우며 태극기를 그린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 백범 김구 선생의 강직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경을 6차례나 넘나든 정정화 의사 등 3·1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의 어머니들도 있었다”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여성독립운동가 발굴 이윤옥 “독립운동사도 남성·유명인에 편중”](https://img.khan.co.kr/newsmaker/1357/1357_34.jpg)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독립기념관 등은 여성독립운동가들 발굴에 힘을 쏟았다. 2%에 불과하던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비율이 20%로 껑충 뛰고, 종전에 170명이던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올 11월 474명이나 됐다.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가 중 서훈을 받은 1만5827 명에 비하면 여성은 여전히 낮은 비율이다.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한 명의 한국 여인이 1000명의 중국 장병보다 우수하다”고 칭송했지만 우리의 여성독립운동가 연구는 ‘남성’에 치우쳐 있다.
문 대통령이 지시하기 이전부터 ‘고독하게’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선양한 여성이 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60)이다. 그는 2009년부터 올 2월까지 꼬박 10년 동안 200명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시로 풀어낸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을 펴냈다. 또 2018년 여성독립운동가 300명을 정리한 <여성독립운동가 사전>을 만들고, 30인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소개한 시화집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출간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 작업을 묵묵히 해온 여성을 찾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12월 6일 그를 만났다.
200명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삶 시로
-3·1운동 임정 100주년 기념사업회 기억기념분과위에서 활동했다. 어떤 일을 했나.
“4개 분과위 중 하나인데 3·1운동 임정 100년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각 지방자치단체 행사 중에서 중복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용산미군기지 터에 기념비적 조형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예산이나 사회적 합의 등의 문제로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문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는 ‘수형기간 3개월 이상’이라는 기준 때문에 서훈 받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이 기준을 폐지하면서 여성독립운동가가 많이 서훈됐다.
“문 대통령의 지시가 굉장히 반가웠다. 사실 3개월이라는 기준은 매우 작위적이다. 고문을 심하게 받았으면 병보석으로 나왔다가 곧 돌아가실 수도 있다. 그나마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사람은 명부가 있어 확인할 수 있지만 중국·만주·러시아·하와이 등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성은 수형기록이 없어 서훈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1889~1979), 석주 이상룡 선생 부인 김우락(1854~1933), 안동 임청각 종부 허은(1907~1997) 등 만주에서 활동하시던 분들이 그동안 이 제약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하다 최근 모두 서훈을 받았다.”
-2009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을 냈다.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 몇 명을 소개했나.
“처음 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 2009년에 여성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170명에 불과했다. 20명씩 소개해 10권을 쓰면 되겠다고 생각해 올 2월 10권 완간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 지시 이후 11월 말 현재 474명으로 늘었다. 계속 책을 써야 하는데…. 그러나 더 이상 자비출판이 어렵다.”

2019년 2월 10년간 작업 끝에 완간한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
-새로운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서훈을 받는 데 기여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나.
“서훈 받은 사람 위주로 소개했고 서훈 받지 못한 분은 따로 2권에 썼다. 이중 이은숙, 허은, 변매화(1897~?), 이해동(1905~2003) 이화림(1905~1999) 등 다섯 분은 이후 서훈을 받았다. 물론 내가 소개했지만 아직 못 받은 사람도 있다.”
‘알려지지 않은 무명’ 여성독립운동가
그가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선양에 나서게 된 이유는 이렇다. 대학에서 고대 한·일 불교교류사를 전공한 그는 2000년 일본 와세다대 객원연구원으로 갔다. 그때까지 그는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없었다. 한국 대학생을 데리고 일본 답사를 다니다 도쿄 YMCA에 있던 2·8독립선언 장소에 갔는데 김마리아·차미리사·황에스터 등의 여성 이름을 발견했다. 추가 자료를 찾았지만 제대로 된 여성독립운동가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라도 자료를 찾아야겠다’고 한 것이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선양의 시작이었다. 그는 <문학세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여성독립운동가를 시로 소개하는 독특한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남성, 그것도 유명한 사람만 반복해 연구한다. 정부와 관련 학자가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기 꺼린 탓이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야 하고 산더미 같은 자료를 뒤져야 하는 무척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이 소장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여성독립운동가에 유독 애착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유관순보다 한 살 어린 동풍신(1904~1921)을 알고 나서부터다.
동풍신은 1919년 3·1혁명 당시 함경북도 명천에서 아버지와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다. 일제의 총에 아버지가 숨지자 동풍신은 아버지 시신을 업고 만세시위를 계속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동풍신은 1921년 일제의 모진 고문을 당하다 순국했다. 부녀가 함께 숨진 동풍신의 죽음은 사실 유관순보다 더 애절하다. 그러나 유관순에 대해선 단행본이 20여 권, 논문 150여 편이 발표되면서 기념관이 세워지고 교과서에 실렸다.
이에 비해 북에서 만세시위를 한 동풍신에 대해서 제대로 된 소개 하나 찾기 어렵다. 정부는 올해 3·1운동 임정 100주년 기념사업을 남북이 함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결국 북한은 ‘정중히’ 공동행사를 거절했지만, 동풍신에 대한 학술대회를 북측에 제안했다면 매우 시의적절한 소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는 여성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기 위해 중국 임정루트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 심지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미국까지 갔다. 그리고 후손을 찾아 사진 한 장이라도 챙겼다.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독립운동가 손녀를 만났는데 앨범을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앨범을 어떻게 보관하나”라면서 “이런 기록은 정부가 보관해야 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현재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소개된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얼굴 사진이 없는 것이 태반이다. 그는 “최소한 독립운동가 얼굴 사진이라도 찾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정부가 할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귀남의 묘 앞에 세워진 이윤옥 소장의 시비.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은 김귀남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없기는 민간도 마찬가지다. 유관순과 같이 수감됐던 모 여대 출신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추가 자료를 찾으러 그 대학에 갔더니 <○○여대 90년사>를 꺼내 줬다. 그런데 학생 독립운동에 관한 사실이 한 줄도 없었다. 그는 총장을 질책하고 오히려 수집한 자료를 주고 왔다. 2년 후 두꺼운 <○○출신 항일독립운동사> 책자가 총장 편지와 함께 왔다. 책 서문에는 그에게 질책받아 이 책을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뒤늦게나마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훌륭한 총장”이라며 “대부분 학교가 학생이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실을 학교역사에 기록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독립운동가로 김귀남(1904~1990)을 꼽았다. 김귀남은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고, 서울 배화여고와 경성제일공립학교, 일본 도시샤대학을 나온 ‘인텔리여성’이었다. 얼마 전 그의 외손녀에게 연락이 왔는데 경기 파주에 있던 외할머니 묘소를 고향 영암으로 이장하면서 이 소장이 쓴 시를 새긴 시비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장은 흔쾌히 허락했고, 독립운동가 김귀남 묘소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다.
이 소장은 1959년 경기 수원 출신이다. 건강이 안 좋아 좀 늦은 1982년 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논문은 일본 고대서에 나타난 불교 교류에 관한 연구다. 그는 720년부터 1702년 사이 1000년간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서기>, <일본기>, <본조 고승전> 불교 관련 고서를 분석했다. 그는 “일본 황태자 교육을 백제 승려가 하는 등 일본 황실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아니면 얘기가 안 된다”면서 “당시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닌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까지 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로 재직하다 그만뒀다. 그는 “수업·업무가 많아 격무에 시달리다가 ‘이러다 제명대로 못 살겠다’는 생각으로 교수를 그만두고 자유롭게 글을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외대 객원교수로 있다. 그는 2008년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를 만들어 일본 고려박물관과 연대해 여성독립운동가를 일본에 알리는 활동도 하고 있다. 이렇게 음지에서, 국제적으로 활동하지만 그는 정부로부터 변변한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다. 기자가 ‘혹 정부 표창이라도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한번 원 기자가 신청해봐 달라”며 웃었다.
그는 “내가 소개한 여성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다. 어렵게 찾아와 주는 보람도 있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을 마무리하고 이제 새로운 10권을 써야 한다. 그런데 출판해줄 출판사가 없다. 계속 자비출판을 해야 하는 것인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